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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Sep 02. 2024

엘리제는 누구를 위해 노래하나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12

맞은편 대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즐기는 남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20대 초반이겠지? 부러운 마음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슬슬 동네 사람들이 나타났다. 곧 반가운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띠리리리 띠리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저 골목 어귀에서 샛노란 옷을 입은 엘리제가 나타났다. 엘리제는 형광 조끼를 입은 호위무사 둘을 옆에 끼고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와 동네 사람들은 엘리제를 향해 준비한 선물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엘리제와 호위무사들은 우리의 선물을 한가득 안고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도 쓰레기 버리기 미션 클리어!  


엘리제가 다가오던 모습


‘엘리제를 위하여’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에서 지겹도록 연습했던 이 노래는 이제 그리운 대만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됐다. 대만에서 지낸 1년 동안 매일 저녁마다 들었던 그 노래, 바로 쓰레기차 오는 소리다.


대만에서 살면서 가장 귀찮았던 일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쓰레기 버리기’다. 우리나라는 집 앞에 쓰레기를 내놓으면 새벽에 미화원분들이 오셔서 치워주시지만 대만의 쓰레기 시스템은 다르다. 대만에서 쓰레기를 버리려면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가야 한다. 그것도 버리는 사람이 쓰레기 차에 직접 집어던져 넣어야 한다. 게다가 일반 쓰레기랑 음식물 쓰레기는 항상 받아주지만 재활용 쓰레기는 플라스틱인지 유리인지에 따라 받아주는 요일도 다르다. 물론 관리원이 있는 아파트 같은 곳은 관리원이 알아서 쓰레기를 처리해 주지만 내가 살았던 쉐하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쓰레기차 오는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는 어플

그냥 정해진 시간에 나가서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은근히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낮에 외출했다가 쓰레기 버리는 시간에 맞춰서 호다닥 집에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고, 쓰레기 버려야 해서 어디 멀리 나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나중에 쓰레기 차 오는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는 어플(까지 있다!!)의 존재를 안 후로는 조금의 자유를 얻긴 했지만 귀찮은 건 여전했다. 어학당 교재에도 쓰레기 버리는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나만 불편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건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었는데, 대만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없기 때문이다! 정해진 봉투가 없으니 알아서 모아놨다가 엘리제의 등에 달린 빨간 플라스틱 통 안에 음식물 쓰레기를 쏟아부어야 했다. 손에 묻을까봐도 걱정이었지만 엘리제의 마음이 너무 급하다는 게 문제였다.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아야 하는 엘리제는 우리에게 아주 짧은 시간만 허락했기 때문이다. 엘리제가 떠나기 전에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버려야 한다는 압박감, 잘못해서 통 밖에 질질 흘려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은 사람을 쫄리게 만들었다.


일반쓰레기차 뒤에 달려 있던 음식물 쓰레기 수거통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난관이었다. 처음으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던 날이었다. 그날은 화요일이었는데, 하메들도 오늘 버리는 게 플라스틱인지 캔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다 누군가 오늘 플라스틱 버리는 날인 것 같다고 해서 일단 들고나갔다. 오늘도 엘리제는 우아한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고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미화원분께 조심스럽게 플라스틱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그러자 미화원분께서 절레절레하시면서 뭐라고 뭐라고 하셨다. 가뜩이나 쫄아있는 데다 원어민의 빠른 중국어로 혼내듯이 말하시니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까만 피부에 체격도 좋으신 아저씨여서 괜히 더 무서웠다. 다행히 "잠깐만(等一下)"은 알아 들었는데, 눈치로 보아하니 "이거 버리는 날이 아니다, 근데 기다려봐라"라고 하시는 듯했다. 일단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피해 옆으로 빠졌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의 손을 살펴보니 다들 플라스틱이 아니라 캔을 들고 있었다.


어쩌지 하고 서 있으니 미화원 분께서 다른 포대 자루 하나를 꺼내시며 이리 오라고 손짓하셨다. 방금 꺼낸 포대 자루에 내 플라스틱 쓰레기를 넣으시면서 또 무슨 말을 하셨는데 몇 분 사이에 내 중국어 실력이 갑자기 늘 일은 없기에 이번에도 당연히 못 알아들었다. 눈치로 보아 플라스틱은 무슨 요일, 캔은 무슨 요일 이렇게 설명해 주시는 것 같았다. 아직 그런 어려운 단어를 배우지 못한 나는 요일은 알아들었지만 그게 무슨 쓰레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엘리제가 떠날 시간이기도 하거니와 다시 들어도 알아들을 뻔하니 일단 "씨에씨에(謝謝, 감사합니다)"를 말하고 뒤돌아 섰다. 아무튼 버렸으니 됐다.


반은 후련하고 반은 찝찝한 마음으로 언덕을 올라가는데, 옆에서 같이 걸으시던 아주머니께서 영어로 말을 걸어오셨다. 마찬가지로 영어도 잘 못하지만 다행히 아는 말이었다. "plastic(플라스틱)은 Tuesday(화요일), can(캔)은 Thursday(목요일)"이었다. 영어 만만세! 아주머니께서 알려주신 정보는 곧바로 쉐하 단톡방의 공지로 올라갔고 비로소 쓰레기를 제대로 버릴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집으로 이사 간 후에는 엘리제에게 선물을 건네줄 일이 없었다. 그래도 대만의 어느 골목에 있더라도 저녁만 되면 어디선가 엘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떠올랐다. 저마다 봉투 하나씩 들고 엘리제를 기다리던 사람들, 옆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정다운 모습.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도 옆 사람에게 무슨 말이든 걸어볼 걸 하고 후회된다. 엘리제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야말로 중국어로 한 마디라도 더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는데 나는 왜 혼자 쭈그러져 있었는지. 다음에 대만에 가면 빈 생수병 하나라도 들고 엘리제가 오는 곳을 어슬렁거려 봐야겠다. 그때 그 아주머니처럼 친절한 대만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니까.


어느 전시회에서 봤던 엘리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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