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11
20살에 서울에 올라온 후 10년 동안 혼자 살았던 나에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쉐하 생활은 솔직히 쉽지 않았다. 아니, 정말 힘들었다. ‘말 통하는 한국인이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판단은 완전한 착오였다. 차라리 말이 안 통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았던 쉐어하우스에는 나 외에 한국인 여자 두 분이 함께 살았다. 그중 한 명인 하메 A(사실 이름도 기억이 잘 안 난다)는 내가 쉐하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쉐하를 떠나긴 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쉐하에 친구를 데려오는 문제였다. 내 상식에서는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쉐하이니 친구를 데려오려면 하메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게 당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거실에 하메 A의 친구가 와 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여자도 아니고 남자. 처음에는 20대 초반인 하메 A의 나이를 생각해서 ‘어려서 모르나?’라고 애써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집에서도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여자라면 공감할 것이다. 집 안에서도 속옷을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마찰을 겪다가 결국 하메 A가 나가게 되었는데, 방에 에어컨을 틀어두고 외출하던 A는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전기세 폭탄을 선물해 주고 떠났다. 그 일로 쉐하를 운영하던 한국인 집주인과도 전기세 분담 문제로 사이가 더 안 좋아졌고, 가뜩이나 에어컨 트는 걸 무서워했던 나는 35도의 더위 속에서도 더더욱 철저하게 선풍기로만 생활하게 되었다.
다른 한 명의 하메 B는 20대 중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보다 어린 나이였지만 사회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생각이 깊고 성숙한 면모가 있었다. 하메 A라는 공공의 적 아닌 적이 생기기도 했거니와 나나 하메 B나 쉽지 않은 삶의 궤적을 그려온 사람들이었기에 같이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인생을 알아갔다.
쉐하 입주 초기,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코시국에 좌절해 있던 시기이자 대만으로 도망쳐 온 나에게 스스로 칼을 던지던 그 시기에 하메 B는 나의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었다. 쉐하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되었을 때 하메 B의 방에서 펑펑 울었던 그날 밤은 아직도 종종 생각난다. 엄마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 우울증을 처음으로 타인에게 털어놓았던 그 밤. 이상한 상사를 만나 마찬가지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던 하메 B는 티슈를 건네주며 그동안 고생했으니 대만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즐겁게 지내자고 위로해 주었다. 그날 하메 B가 티슈와 함께 건네줬던 대만에서만 판다던 콘스프맛 치토스는 그야말로 인생 과자에 등극했다.
대만 사람들 눈치 보느라 동네 안에서만 지내던 내가 타이베이의 더 먼 곳으로 다니기 시작한 것도 하메 B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하메 B가 한국인 친구 C랑 시먼딩에 갈 건데 같이 가겠냐고 물어봐준 덕에 대만에 온 뒤 처음으로 타이베이 시내로 외출했었고, 6월 초의 어느 저녁에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옆 동네에 있는 비탄 풍경구에 가서 고요한 하천을 바라보며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다. 이후에도 역시 하메 B의 제안으로 그 친구 C랑 함께 셋이 단수이에 갔던 날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단수이의 아름다운 노을과 재회하는 기쁨을 누렸다.
코로나 끝날 때까진 동네 밖을 못 벗어날 거라던 내 생각과 달리 시먼딩, 비탄 풍경구, 단수이 그 어디에도 “이 시국에 어딜 집 밖에 나와!”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대만 사람들도 야외로 나와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절대 집 밖에 나가면 안 된다던 인터넷 여론과 현실은 매우 달랐다. 하메 B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동네 안에 갇혀 눈물만 흘리다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먼저 자신의 아픔을 꺼내어준, 같이 나가지 않겠냐고 말해준 하메 B 덕분에 대만 워홀의 첫 위기를 견딜 수 있었다.
솔직히 고하자면, 하메들 이야기를 쓸지 말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하메 A도 그렇지만 하메 B와도 결국 좋지 않은 사이로 끝났기 때문이다. 몸 건강에도 이상이 생겼을 만큼 이루 말로 못할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싶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상황도 그렇고 무엇보다 내 정신 상태가 그리 건강하지는 않았기에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도 어른스럽지 못하게 대응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부끄러운 기억이기도 하다.
그래서 쓴다. 하메 A든 B든 나의 대만 워홀을 함께 해주었고, 날 힘들게도 했지만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던 사람들이기에 기억하고 싶다. 비록 미숙했던 지난날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이라도 모두가 나의 시간이었기에 잊지 않고 싶다. 그래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