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14
한국에서 반년 동안 혼자서만 중국어를 배운 나에게 초창기 대만 생활은 아주 사소한 일 하나에도 큰 용기가 필요한,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도전 그 자체였다.
워홀 당시 나에게는 미션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나를 대만으로 이끌어준 드라마 ‘상견니’의 대사집을 완성하는 것이다. 중알못에게 일명 ‘상견니 받아쓰기’ 미션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대만의 모든 TV 프로그램에 중국어 자막이 같이 나온 덕분이었다. 당연히 자막을 봐도 모르는 글자가 태반이지만 '메이 우언티(沒問題)', 문제없었다. 나에겐 파파고(네이버의 번역 어플)가 있었다.
엑셀 파일에 한 줄 두 줄 대사를 쌓아가던 중 문득 이걸로 중국어를 연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야말로 책에서는 배울 수 없는 ‘찐’ 생활 중국어 아닌가! 문제는 어디에 가서 인쇄를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검색 끝에 대만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프린트'를 '影印'이라고 한다는 걸 알아내 곧바로 구글 지도에 검색해 봤다. 마침 징메이 아침 시장 가는 길목에 인쇄소가 있었다.
다음 날 인쇄소 앞에 도착했다. 매일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여기가 인쇄소였다니. 미닫이 문 너머로 커다란 프린터기와 몇 대의 컴퓨터 화면, 수많은 종이들, 살짝 무뚝뚝해 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보였다.
'들어가서 뭐라고 하지, 컴퓨터도 다 중국어일 텐데, 잘못해서 컬러로 뽑아서 요금 폭탄 맞으면 어떡하지'
심장이 팔딱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미닫이 문을 열었다.
약 5분 뒤, 내 손에는 '상견니' 대사가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심지어 양면 인쇄까지! USB를 꽂는 곳을 못 찾아 두리번대긴 했지만 친절하신(!) 주인 아저씨께서 알려주셨고, 중국어가 빼곡하게 적힌 컴퓨터 화면에 머리가 띵했지만 얇은 한자 지식과 영문 압축키의 도움으로 컬러가 아닌 흑백으로 무사히 출력했다. 얼마라고 말하시는 주인 아저씨의 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거스름돈을 역으로 계산해서 장당 0.6위안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한 장에 얼마예요?"라고 물어보는 용기까진 내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어쨌든 뽑았으면 됐다.
산책하던 걸음을 멈추고 세븐일레븐(대만에서는 ‘세븐’이라고 한다) 앞에 서서 고민했다. ‘아, 오늘까지 내야 하는데...’ 걱정을 한가득 안고 세븐 안으로 들어갔다. 상품 진열대가 아닌 카운터로 곧장 가서 가방에 있던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며 물었다.
“전기세 납부하려구요(我要交電費).”
오는 길에 파파고를 보면서 수십 번 연습했던 말이지만 역시나 더듬거렸다. 이놈의 성조. 제대로 말했겠지? 직원분이 종이를 보시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셨다. 휴, 다행이다.
대만은 특이하게도 세븐일레븐 같은 편의점에서 공과금을 납부할 수 있었다. 하메들 말로는 가서 그냥 전기세 내러 왔다고 하면 된다고 했지만, 편의점 자체를 몇 번 가보지 않은 내게 ‘그냥’이 ‘그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기세 내러 왔다”는 말은 내가 공부한 중국어 책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막연한 두려움에 망설이다 보니 어느새 납부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다. 결국 추가 요금이라는 채찍이 나를 편의점 카운터 앞으로 들이민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도대체 왜 겁을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직원분이 알아서 다 해주셨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돈을 받아 계산하고 고지서에 납부 영수증을 스테이플러로 찍은 다음 마지막으로 확인 도장을 쾅 찍으니 끝이었다. 5분도 채 안 걸렸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질문도 없었다. 한 스푼도 아니라 '반 스푼'의 용기만 있으면 되는데 나는 왜 며칠 동안 마음 졸이며 걱정만 했었는지. 못 하는 중국어로 대만에 올 용기는 있어도 편의점에 들어갈 용기는 없는 스스로가 참 우스워 보인 날이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찾아 까르푸(家樂福, 우리나라의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에 갔던 어느 오후, 매대를 둘러보다 말차라떼 파우더를 발견했다. 36위안(당시 환율로 약 1,500원)? 게다가 두 개 밖에 안 남아있네? 이게 웬 횡재인가! 대만의 밀크티만큼이나 말차라떼를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안 살 수가 없었다. 블로그에 올려야지 하고 사진도 찍었다. 두 개 다 사서 쟁여놓을까 고민하다가 맛이 어떨지 모르니 하나만 담았다.
물 사러 온 것이었지만 역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총 금액이 많이 나왔다. 일단 계산을 마치고 나와 영수증을 확인하는데 말차라떼 가격이 이상했다. 영수증에 '99위안'으로 찍혀 있었던 것이다. 3'9'위안도 아니고 '99'위안이라니!
그냥 갈 것인가 아니면 환불을 할 것인가. 한국이었다면 당연히 물어봤겠지만 여기선 괜히 진상 손님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물어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옆에 서 계신 직원분께 말했다.
"이거 좀 이상해요(這個有點奇怪)."
'이상하다(奇怪)’,'상견니'에서 배운 단어이자 생각나는 최선의 단어를 내뱉으며 아까 찍은 사진을 띄운 폰과 영수증을 내밀었다. 직원분께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시더니 맞은편에 있던 고객 센터로 데려다주시며 고객 센터 직원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셨다. 짧은 중국어로 이해하기로는 원래 99위안이 맞는 건데 36위안으로 잘못 기재된 것 같았다. 결국 차액인 63위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상한' 손님이 되지 않아서.
이 외에도 중알못으로서 대만에서 사는 동안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무수히도 많았다. 음료를 시켜 먹는 것부터 물건을 환불하는 것까지 '중국어'를 내뱉어야 하는 모든 일들이 퀘스트였다. 하지만 대만에서 '사는' 이상 잘하든 못하든 중국어를 해야 했다. 당시에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고마운 스트레스였다. 아주 작디 작은 퀘스트들이 쌓여 '대만에서 살아갈 용기' 스킬을 '레벨 업' 해주었으니까.
그러니 중국어를 못 한다고 해서 대만 워홀 도전을 포기하지 마시라. 우리에겐 '번역 어플'과 '친절한 대만 사람들'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