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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멀어지고 우정이 다가왔다

3부.이혼이 내게 남겨준 것들(2)

by 유해나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소수의 친밀한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다수와 폭넓게 친해지기보다 오로지 딱 한 명, 마음 맞는 베프와 둘이 노는 것을 좋아했다.



10대 때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면, 20대에는 남자친구가 '한시적 베프' 역할을 해 줬다. 어떤 면에서 남자친구는 동성 친구들보다 더 나은 면이 있었다. 친구에게 털어놓긴 너무 진지한 속얘기들도, 가족에게 털어놓긴 부끄러운 얘기들도 남자친구에게는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었으니까.



가족들 앞에서는 야무지고 믿음직한 장녀로, 친구들 앞에서는 이성적이고 쿨한 친구로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나 역시 때때로 외로워하고 종종 불안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은 왠지 부끄럽고 못난 일처럼 여겨졌다.



남자친구는 달랐다. 남자친구는 나의 나약하고 감정적인 모습도 모두 받아주고 이해해 주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랬기에 나는 남자친구 앞에서는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다. 문제는 모든 연애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 든든한 내 편일 것 같던 남자친구도, 헤어지고 나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그 공백을 견디기 힘들어서 20대 내내 쉴 새 없이 연애했다. 한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곧바로 새로운 남자친구를 만났다. 남자친구가 1순위인 생활을 몇 년간 하다 보니, 그나마 친했던 동성 친구들과 점점 멀어지고, 또다시 새로운 남친을 사귀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X와 헤어지기로 하고 가장 걱정했던 것 역시, 매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연락하고 지내는 동성 친구는 몇 명 있었지만 소위 말하는 겉친구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친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속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X와 헤어지면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X와 이혼을 고민할 무렵부터 친구 M과 급격히 가까워졌다. M은 대학 친구로, 10년 가까이 연락하고 지냈지만 내심 거리감을 두고 있는 친구였다.



내가 M과 적당한 거리를 뒀던 건, 그 친구가 나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부러지고 야무졌으나 인정 욕구가 강해서 M과 만나면 서로 은근한 견제를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M을 보고 있으면 거울로 나의 안 좋은 부분을 보는 것 같아 불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서로 닮은 우리답게 M의 남자친구도 X와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고, 내가 이혼을 고민할 무렵 M도 남자친구와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연애에 대해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 게다가 각자 연인의 단점도 비슷한 점이 많아서 우리는 서로의 속얘기를 하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남들에게 속얘기를 잘 털어놓지 못하는 나였는데, M의 진심 어린 위로와 공감에 어느새 마음의 빗장을 스르륵 풀어버렸다. M 역시 완벽함이라는 가면 뒤에 속 깊은 감정과 생각을 숨겨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상대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고통을 위로해 주며 함께 울고, 서로의 성장을 응원해 주며 함께 웃었다. X가 채워주지 못하던 부분도 같은 여자인 M은 이해해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본 "좋은 친구"가 있다는 느낌. 가족이나 연인만큼 가까울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대하는 사이. 솔직한 나의 마음을 얘기하고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이렇게도 충만한 느낌이었구나 알게 되었다.



만약 내가 X와 계속 함께였다면 좋은 친구를 사귈 필요성을 못 느꼈을 테고, M의 진가를 알아볼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언젠간 끝이 나는 사랑과는 다르게 우정은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혼 후 1년 동안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도 M의 존재였다. "힘들 때면 언제든지 연락해. 내가 항상 곁에 있을게" 라고 진심으로 말해주는 M 덕분에 힘든 날들도 견딜 수 있었다. M이 아니었다면 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불건강한 연애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이런 나를 지지해 주고 곁에 있어준 M에게 참 고마운 마음이다.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응원해 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다. X와 헤어진 덕분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생겨서 감사하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서 우정이 피어났다. 이혼이 내게 남겨준 것 첫 번째는 좋은 친구와의 심 어린 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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