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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씨앗을 보고 왔다

헌법재판소, 응답하라 2025

by 꼬꼬 용미

봄은 왜 더디 오는가.


예전에 살던 수원에 볼일이 있었다. 유아차를 밀며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걸으니,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인도가 없어 차와 유아차가 뒤엉키던 길에 말끔히 데크가 둘러져 있다. 안정감이 느껴진다.


일월 호수를 따라 걸었다. 예전에 없던 유리온실이 유난히 반짝인다. 진분홍 색깔의 모네*일월 특별기획전이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호수 옆으로 일월수목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2023년 5월 20일 개원). 반짝이는 유리온실이 어서 들어오라고 나를 유혹한다.


화장실이 급해 방문자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봄 햇살이 통유리 안으로 화사하게 들어온다. 삼삼오오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로비 한쪽에는 투명하고 동그란 원기둥이 있다. 그 안에는 예쁜 식물과 꽃이 있고 그 위를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배추흰나비, 노랑나비가 날고 있고 암끝검은표범나비는 보이지 않았다. 따뜻한 봄의 전령사들을 만나 반가웠다. 온실 안은 이미 봄이었다.


수목원 밖 넓은 잔디밭과 호수 근처에는 아직 꽃이 없었다. 그래서 수목원 관람은 포기했다.


그런데 꽃향기가 흘러넘치는 꽃가게 앞에서 꽃향기에 취하고 눈을 떼지 못했다. 배고니아, 히아신스, 튤립, 겹수선화, 치자나무를 들여다보며 홀딱 반해 버렸다. 결국 뒤늦게 수목원 티켓을 사고 말았다. 다자녀 가족의 입장권은 1,000원이었다(가족관계 증명서 필요). 3,000원 할인을 받고 좋아했다.


KakaoTalk_20250324_175124221.jpg 일월수목원 방문자 센터 안의 꽃집, 여기는 봄이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유리온실로 곧장 달려갔다. 입구부터 모네의 그림 사진과 알록달록 꽃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관리 직원이 혼자 온 나에게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었다.


캘리포니아 보타닉가든에서 봤던 사막의 선인장들과 신기한 식물들이 이국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커다란 선인장나무알로에, 올리브나무 등 수십 종의 나무와 꽃들이 아름답다. 길을 따라 걸으며 신기한 식물들을 눈으로 빨아들일 듯 빠르게 훑어보았다. 곳곳에 모네의 그림들이 마치 꽃처럼 피어 있는데, 온실 속의 분위기와 작품이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되는 느낌이다. 모네의 방과 초록색 철문도 잘 꾸며져 있다. 창문 너머, 철문 너머의 정원을 훔치고 싶을 만큼 탐이 났다.


KakaoTalk_20250324_174825505_03.jpg 전시온실 내부


멀리서 봤던 빛나는 유리온실이 전시온실이다. 건조기후를 테마로 지중해,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 등 전 세계 대표적인 건조기후 지역의 흥미로운 자연생태 환경과 식물이 전시 중이다. 이것은 물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한 온실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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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온실 입구/ 초록색 철문


온실 밖 드넓은 잔디밭에는 흔들의자와 테이블, 벤치 등이 있다. 사이사이 길이 나 있고 산책하며 자연을 만끽하기 참 좋아 보였다. 봄이 오면 입구 쪽에 있는 장식정원에 튤립과 꽃들이 만발할 것이라 한다.


아직 봄은 아니었다. 건조한 잔디와 앙상한 나무들이 푸르른 잎을 틔우고 싹을 내려고 준비하는 모양이다. 햇살 속에서도 바람은 여전히 차다. 방문자 센터 안의 평화로운 일상과 바깥의 온도 차가 꽤 컸다.


건물을 나와 출구를 찾다가 희망나무를 발견했다. 시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특별한 정원 희망나무가 건물벽에서 자라고 있었다. 기부를 통해 희망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중에서 기관기부 헌법재판소가 눈에 띄었다.


KakaoTalk_20250324_174825505_05.jpg 일월수목원에서 자라고 있는 희망나무




나는 서울로 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둘째 언니와 남동생이 나와 셋이서 저녁을 먹었다. 삼겹살, 맥주 한잔과 함께 원가족의 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만 지방에 떨어져 살기 때문에 명절 때가 아니면 만나기 힘들다.


다음 날은 언니들과 셋이 모여 브런치를 먹고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 향에 취해 아이들과 형부와 남편 이야기, 우리 나이 먹어가는 이야기, 폭폭한 세상사 이야기를 맘껏 했다. 그래도 내 속을 조금 까뒤집고 내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서로의 거칠어진 마음의 티를 하나씩 떼어 주며 ‘이런 게 인생이지’ 했다. 네 마음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서. (나이가 들수록 형제 많은 게 더 좋다.)


그리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갔다. 출구를 찾다가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글자를 발견했다. 30주년 명성황후가 그제야 떠올랐다. 이달 말까지 공연한다고 했었지. 나는 또 뭔가에 이끌려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나와 버렸다. 어떻게 생겼는지 건물이라도 좀 봐야지 했다. 세종문화회관 계단을 반쯤 점령하고 사람들의 거친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허공을 찌른다.


나는 세종문화회관으로 들어갔다.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 가족끼리 연인끼리 뮤지컬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여기는 딴 세상이었다. 어리둥절했고 한참 멍했다.


명성황후 공연은 2시. 15분 전에 아직 표를 살 수 있다고 안내를 받았다.


'영화도 아니고 뮤지컬 공연을 혼자 볼 수 있을까.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있겠어? 세종문화회관이 광화문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건 운명이고 하늘의 뜻이야.’


또 표를 사 버렸다. 지방 사람이 아닌 것처럼, 처음부터 뮤지컬을 보러 온 것처럼 굴기로 했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청바지 차림의 나를 나만 몰랐다. 다행히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뮤지컬 가수들의 우렁찬 노랫소리와 감미로운 선율에 귀가 호강한다. 천상의 목소리들이 춤을 추며 화려한 무대를 채우고 있다. 마치 진공관 안에 있는 것처럼 공연에 몰입했다.


그러다 문득 바깥에서 울리고 있을 갈등의 소리와 아름다운 가수들의 목소리가 자꾸만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명성황후와 고종, 흥선대원군과 백성들 모두가 우리나라를 위하고 걱정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배우들의 노랫소리가 절규처럼 들렸다. 미우라가 설치는 궁 안에서 긴장감이 최고조로 달아오르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 벌어지는 현실이 너무도 아팠기 때문이다.


국모의 영혼이 웅장하게 부르는 마지막 노래가 인상적이다.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동녘 붉은 해 동녘 붉은 해 스스로 지켜야 하리

조선이여 무궁하라 흥왕하여라

(명성황후 OST, '백성이여 일어나라' 중에서)


세종문화회관에서 나와 광화문으로 갔다.


따끈따끈한 신혼부부가 몇 달째 길바닥에 나와 헤매고 생업을 포기하고 나온 자영업자와 직장인들이 거기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높다. 한창 공부를 하며 꿈을 키워야 할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나와 자리를 지키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천진한 아이들, 국회의원, 변호사, 가수들을 보며 또 눈물이 났다. (너무 미안해서.) 나도 외쳤다. 큰 소리로 외쳤다!


들불처럼 일어난 시민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깃발들의 물결이 파도처럼 휘날린다.

희망의 씨앗이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


유리온실에서 봤던 평화로운 장면들이 다시 떠오른다. 우리는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을 되찾고 싶은 것이다.


헌법재판소, 응답하라 2025


서울의 봄을 기다린다.

대한민국의 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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