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복이 터졌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딱 10년이다. 집 근처 천변을 셀 수 없이 많이 다녔다. 산책이나 운동을 하러 갔었고 눈이 오면 눈 구경하러 갔다. 아이들이 롤러보드나 롤러스케이트, 자전거를 배우고 타거나 날씨가 좋아도 아무 날이 아니어도 천변을 갔었다. 아이들은 나비를 쫓고 곤충을 잡았다. 아이 셋과 그곳에서의 추억이 참 많다. 그때 나는 아이들만 보았다.
“여기에 꽃이 있었나?”
어느 날 하얀 꽃들이 팝콘처럼 팡팡 터져 가지가지마다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언제부터 나를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었을까. 미처 알아보지 못한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래, 내 허리춤까지 오는 나무들이 있었지. 초록초록 진한 잎사귀들이 빽빽하게 줄을 지어 서 있었지. 나무라고만 생각했지 꽃이 피는 줄은 몰랐다. 기다란 가지에 알알이 맺힌 하얀 꽃들이 앙증맞다. 조팝나무다.
충격과도 같았던 순간이었다. 이후로 이따금 꽃들이 나를 부른다.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꽃들이 향기를 풍기고 존재감을 드러내며 날 꼬신다.
운전을 하다가 문득 가로수를 보았다. 연한 초록색 잎사귀 위로 가늘고 길게 하얀 꽃잎들이 흐드러진다.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인 나무가 눈을 맞은 것 같기도 하고 나무가 꽃들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운전을 하는 통에 오래 감상하지는 못했으나 양 옆으로 가로수 꽃나무가 줄지어 선 그 길이 너무 좋았다.
"이팝나무잖아요!"
주말에 아들을 영재원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뒷좌석에 앉은 아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꽃 이름을 뱉는다.
"너무 아름답다~"
나는 감탄만 했다. 봄만 되면 생각난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
...(중략)...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 내가 사랑한 얘기
우 우 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우우 아름다운 세상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중에서, 이문세)
이문세 노래를 들으며 라일락꽃을 알았다. 그냥 이름만 알았나 보다.
몇 해 전, 남편이랑 산책 삼아 걷다가 달큼한 향기에 이끌려 멈춰 섰다.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었다. 다섯 시간째 걷고 있었으니까. 투덜투덜 입이 한 뼘쯤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 향긋하고 뭔가 익숙한 향이 나를 한 그루 나무 앞에 세웠다. 연보랏빛의 꽃들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다. 피곤한 기분이 싹 가셨다.
"라일락이야."
"정말? 이게 라일락이었어?"
섬유유연제에서 맡아보았고 꽃은 어떻게 생긴지도 몰랐던 내게 남편이 라일락을 알려 준다. 그 순간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동네 친구와 동생, 언니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 보다는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가 좋았다. 물론, 다 좋기만 했을까. 속 터지는 이야기들, 답답하고 억울한 이야기들, 누가 들을까 망설여지는 것들, 남편, 시댁, 아이들에게 섭섭했던 이야기들을 다 수다로 털었다. 비슷비슷하게 속 끓이고 산다는 것을 확인하면 서로 동료애가 돋아나고 뭔가 든든해서 집으로 돌아갔었다. 서로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와 진심 어린 충고가 좋았다. 수다는 나를 달래고 서로를 달래는 수단이었다. 일상이 분주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았을 때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만으로 족했다.
빈 둥지 증후군일까. 내 둥지에도 텅 빈 시간이 늘어간다.
이제는 동네 카페를 벗어나 유명한 곳에 가서 아포가토나 바닐라 라떼를 마시고 밥 대신 브런치가 먹고 싶어진다. 비싼 학원비는 척척 내면서도 나를 위해 맛있는 밥과 우아한 커피를 사 먹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아는 동생이랑 커피를 마시다 갑자기 ㅇㅇㅇ 농장에 구경을 갔다. 새로 생긴 예쁜 비닐하우스 농장이 눈에 밟혔었다.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식물이라는 글자와 농장이라는 글자가 자꾸만 내 시선을 끌었다. 언젠가 한번 가야지 했는데 아는 동생도 그랬다고 한다.
높다랗고 커다란 비닐하우스에 막 들어서자마자, 꽃향기가 한꺼번에 내 안으로 들어와 폭발한다. 비염으로 냄새를 못 맡는 줄 알았는데, 웬걸. 누군가 수많은 향수병을 내 앞에 들이부은 듯이 꽃향기는 강렬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보랏빛과 연분홍빛, 하얗고 노랗고 현란한 색들이 나를 몽롱하게 한다. 꽃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과 예쁨을 뽐내는 자태와 싱그러움에 감탄사가 연발 나왔다.
“와~ 정말 예쁘다.”
“이건 무슨 꽃이야?”
“너무 향긋해.”
튤립과 베고니아, 히아신스와 프리지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꽃들이 줄지어 서 있다. 아기자기한 들꽃 같은 야생화도 화분마다 곱게 담겨 있다.
바로 옆에는 널찍하게 띄엄띄엄 좌석을 배치한 카페가 농장 비닐하우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농장과 카페가 마치 한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꽃을 구경하고 차를 한 잔 더 마실까 싶었지만, 우리는 꽃구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아는 동생이 베고니아 화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자리를 옮겨 튤립과 카라를 만지작거린다. 나 또한 향기를 맡으며 조바심이 났다. 장미가 좋을까 프리지어가 좋을까. 망설임이 길어진다.
봄은 봄인가 보다. 똑같이 아들 셋을 키우는 삭막한 우리 엄마들의 마음에 자꾸만 꽃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또래나 선배 언니들의 프로필에 자주 등장하는 사진은 꽃이다. 예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몇 해 전부터 꽃이 자꾸만 비집고 들어와 텅 빈 내 가슴을 채운다.
오래전 유럽 자유여행을 꿈꾸며 모아둔 돈이 있다. 우리 둘의 공금이다. 꿈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과 상황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 각자 가족여행에 모은 돈을 보탰다. 우리는 다시 돈을 모으고 있다. 언젠가 꼭 유럽에 가자고! 적금을 헐고 남은 공금으로 좋은 날, 어떤 날, 만나서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먹으러 다닌다.
“오늘은 꽃을 사자! 우리가 모아둔 돈으로.”
살림을 하자면 선뜻 사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할 때가 많다. 아이들 학원비는 몇십 만원씩 척척 내도 우리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줄 꽃에는 지불할 여력이 없다. 엄마가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하지 않을까. 너무 멀리 있는 유럽여행의 꿈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를 살아갈 마음의 힘이 되어줄 꽃도 필요하다. 그날 우리는 밥 먹고 커피 마시고 꽃까지 사서 돌아왔다.
버니지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보고 싶은 콘서트와 공연, 초밥집, 화덕 피자집... 줄줄이 마음속에 줄을 세웠다.
“여보, 장미 사 왔다!”
“장미는 진딧물 많은데.”
장미가 활짝 핀 화분을 내밀었는데, 퇴근한 남편 대답이 멋없다.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장미 구입을 계속 망설였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은 해야 직성이 풀린다.)
“장미의 뜻은 진딧물이 많은 데가 아니고요. 열렬한 사랑과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예쁜 꽃이라고요. 진딧물이 생기기 전에 꽃 실컷 보고 마당 화분에 심을 거예요.”
장미 옆의 프리지어 꽃향기가 그윽하다. 꽃 복이 터졌다. 일월수목원에서 꽃을 보고 온 것이 엊그제인데 말이다.
아침마다 식탁에 놓인 장미와 프리지어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