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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아시여, 홀라당 해져요!

by 송유성

그가 처음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오만과 편견] 책 속에 오만 원을 넣어두고 갔어요. 그날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주간이었고 그를 포함한 여러 명의 지인과 우리 집에서 파티를 하기로 했던 날이었습니다.

사실 그와는 그날의 파티가 있기 전에 이미 눈이 맞았던 것 같긴 합니다. 처음 그와 밖에서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거든요. 아무 일도 없었다기엔 우리는 다소 숙숙한 긴장감을 만들고 있었어요. 아마 같이 파티를 했던 동료들도 눈치를 챘을 거예요. 좋아하는 마음은 숨기는 것이 제일 어려운 보물 같아요.

어쨌든 그날 다 같이 우리 집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웠어요. 제가 만든 음식을 먹고 다 같이 보드게임도 했어요. 그리고 한참 놀다 차편이 늦다며 남은 정리를 그에게 부탁한다며 갑자기 하나둘 돌아가 버렸어요. 아마 눈치껏 빠져줬던 것 같아요. 저는 다른 사람들이 집으로 간다고 할 때 그도 같이 가라고 떠밀었는데 그가 뒷정리를 돕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사실 그때 이미 저는 많이 취해 있어서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이 걱정되어서 보내려고 했거든요. 아, 그가 아니라 제가 걱정됐어요. 이미 저는 그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내가 그를 잡아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아무튼 그는 우리 집에 남아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어요. 집에 놀러 온 손님이 이것저것 치우고 있는 것이 꽤 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만, 취기가 몸을 짓눌리고 있어서 말리는 것도 힘들어 내버려뒀습니다. 죄송과 의지는 조금 다른 일 같았어요. 저는 조금 누워야겠다고 방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답니다. 다 큰 처자의 집에 외간 남자를 두고 잠드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어요. 뭐 어때요. 이미 좋아하고 있었고 그는 선을 지키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잠시 잠든다는 것이 눈뜨니 아뿔싸 다음날이었습니다. 주방으로 가보니 분리수거는 완벽하게, 설거지는 말끔하게 되어있었어요. 별다른 말도 없이 척척 치우고 간 그 사람이 또 한 번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아요.

저는 민망해도 할 인사는 해야 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 같아서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술에 취해 돕지 못했다고 죄송하다고 했지요. 무슨 행동이나 말이건 사실 다 계기에 불과했지만요. 아마 다들 그렇게 쪼그만 연락할 구실을 찾아서 수작 부리잖아요. 저도 수작 부리려고 문자를 보냈지요. 그가 답장했어요. [오만과 편견] 책 사이를 한번 보라고. 다 세어보지는 않았는데요, 제 방에는 1,000권이 넘는 책이 있어요. 책장에도 바닥에도 침대맡에도 여기저기 책이 널브러져 있죠. 그 많은 책 가운데 민음사 시리즈를 모아 둔 곳에서 오만과 편견을 찾아 펼쳤습니다. 책 사이에서 현금 오만 원이 나왔습니다.


잘 놀다 간다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넣어 둔 약소한 돈이래요. 제가 잠에 빠져서 널브러져 자는 동안 제 방에 조용히 들어와서, 책장을 훑어본 다음에 오만과 편견을 골라서 오만 원짜리를 잘 펼쳐서 넣어두고 갔겠죠. 왜 하필 오만과 편견에 넣어두었는지 훗날 물어봤는데요. 해피엔딩이어서 넣었댔어요. 우리는 해피엔딩은 이루지 못했지만요.


근데 참 적절한 책을 고른 것 같아요. 책도 일 년에 한 권도 안 읽는 양반이 오만과 편견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내용도 적절했던 것 같아요. 그를 만나는 동안 저는 그를 남주 ‘다아시’로 봤던 것도 같거든요. 오만하고 콧대 높은 남자라고요. 하지만 그는 매번 혼자 사는 할머니의 요플레를 챙기고 주변 사람들의 대소사를 챙기는 사람이었거든요. 생각보다 오만하지 않고 책임감이 강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점점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를 좋아하다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겠죠.


그와 헤어지고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봤어요. 가끔은 이별하면 별생각 없이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당겨요. 저는 막 슬픈 영화와 음악에 몰입해서 눈물을 쏟아내면서 해소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적절하게 가벼운 정도의 감성팔이면 자기 연민의 늪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생각 잊기에 충분한 정도가 좋은 스타일이거든요. 그래서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틀었죠. 근데 잘못 틀었어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도 ‘다아시’가 나와요. 아마 작가가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를 따서 작중인물을 만들었을 거예요. 영화 속 다아시도 오만한 태도로 많은 오해를 사거든요.


그가 뭐 되게 소설이나 영화 속 다아시는 아니었는데요, 조금 비슷했던 것도 같아요. 괜히 긁어 부스럼인 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오해를 산다거나, 알고 보니 따뜻한 사람이라거나 그런 면들이 말이에요.

영화가 끝나고 얼마나 울었는지요. 거실에서 펑펑 울었어요. 오전에 기분 좋게 운동을 다녀와서 ‘아, 이제 이별도 정말 갔구만!’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틀었다가 눈물 콧물 쏙 뺐습니다. 저는 브리짓만큼 긍정적이지 못했고 그는 다아시만큼 용기 있지 못했던 것도 같고 그랬어요.


영화 올드보이에 그런 대사가 나와요.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고.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일까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결국 문제는 마음속에 자꾸 자라나는 먼지들을 잘 관리하는 일인데 그게 잘 안돼요. 사랑하니까 그 사람이 날 싫어할까 봐 쌓아두고 내가 너무 초라해질까 봐 또 덮어두다 그게 자꾸 무거워져요. 시간이 지나면 뭐가 중요했던 건지를 잊어버리죠. 모래알이었는데 어쨌든 그것도 가라앉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면서 사랑을 놓아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 앞에서는 홀라당 솔직해져야 해요. 그래야 미운 것도 사랑스럽고 구겨진 것도 귀엽고 그렇거든요. 온전하지 못한 감정은 자꾸 사랑에 찌꺼기들을 붙여서 결국, 무거워서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불완전한 마음들까지도 꺼내어 서로 빨가벗은 상태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공평하게 둘 다 부끄러운 상태로 싸워야 하는 일이에요. 누구 하나가 빤쓰라도 입고 있으면 불공평한 게임이 되죠. 정당하게 부끄러운 상태로 상대의 부족을 요모조모 살펴보는 일, 부끄러운 마음과 상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함께 의논해 나가는 일, 그런 것이 사랑을 아주 오래도록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만나는 내내 부끄러웠어요. 홀라당 다 벗고 서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는 치사하게 옷 좀 입고 있었죠. 그래서 게임이 안 됐는데 왜 지가 갔는지는 모르겠어요. 너무 홀라당 벗고 당당하게 서 있어서 전투 의지 상실해서 간 것도 같아요. 아주 페어플레이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저는 다음 사랑을 하게 되어도 잘 벗고 있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어요. 모든 게임은 내가 정당하게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잖아요. 그를 만나는 동안 흘렸던 눈물과 아픔은 아주 거대한 바위였지만 그런 것은 저를 가라앉게 만들지 못했거든요. 오히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싸워와서 단련되었어요. 단단해진 속 근육이 움찔움찔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다음에도 홀라당 다 벗고 사랑할 거예요. 나의 홀라당에 홀라당 넘어올 사랑이 어디선가 걸어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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