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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의 끝에 서서 가만히 두 손목을 쥡니다

by 송유성

몰라요. 내 마음대로 이뻐할래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공감 속으로 다이빙해서 내 마음대로 별명 지어 버린 ‘공감 요정’ 언니가 그랬는데요, 그를 그만 미화해도 될 것 같다고요. 사귀는 동안에도 미화했고 끝나고도 미화해 줬으니 그만 미화하라고요.

근데 나는 당신을 미화한 채로 살래요. 그건 당신을 위한 일이 아닌 영영 예쁜 것만 보고 살고 싶은 나를 위한 일이랍니다.

객관적인 지표를 들이대면 이쁜 사람이 어딨어요. 다 기준치 미달, 평균 미달, 점수 미달일 텐데요. 다 어그러지고 못난 사람들뿐인데요.

하지만 사랑은 환산표를 들이대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당신의 이쁜 것만 보이니까 불가항력으로 사랑하는 거죠.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한데요. 수동적인 건 아닌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선택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고 같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주 걸린 허수아비 왕자를 오랫동안 사랑한 일이라고 생각할래요.

그를 사랑한 마음이 백발처럼 하얗게 새어버렸지만, 완전한 백발은 흑발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잖아요. 나는 표백될 만큼 울어서 시원해졌습니다.

오늘의 나는 그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지는 못했어도 위풍당당이지요. 폭삭 늙어서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가 떠나고 늙어가는 것이 좋아졌습니다. 삶에도 조금 능숙해진 것 같고요.

사랑만 해보려고 덤벼드는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이겨낼 재간이 없어요. 당신은 내가 무서웠을 거예요. 당신은 아닌 척해도 진짜 앞에 서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내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 떼쓰고 울고 어리광 부렸어요. 뭐 어때요. 나이가 들면 자꾸 철만 들어야 하는 것 같은데 기분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보는 일 해보니 즐거웠어요. 그러고 나니 내가 다 졌어요. 내가 다 져서 이제 잎이 나와요. 잎이 아주 푸르고 새큼한 단맛이 났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다정한 모든 것이 위험해요. 독 같아요. 그가 곁에 있을 때의 다정은 백신 같았는데 그가 떠난 뒤의 다정은 나를 무너트려요. 온몸에 서서히 퍼져서 밤에 최고조를 이루어요. 다정이 나를 죽이기도 해요. 다정이란 벌레가 나를 갉아 먹기도 하더라고요.

하지만 열병을 앓고 이겨내면 면역이 생기잖아요. 나는 당신을 꼬박 앓아서 면역이 조금 생긴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이제는 우후죽순 제멋대로인 마음은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당신을 꼬박 사랑했고 당신을 이겨내어요. 나의 구김을 이겨내어요.

새벽이 제일 긴 사랑을 보냈어요. 나른한 오후는 잠시였지만 좋은 순간은 빨리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회색이 익숙한 사람 곁에서 종종 시들기도 했지만, 당신이 날 살렸던 축축한 순간도 많아서 나름 오랫동안 호흡하면서 당신 옆에 머물렀네요. 음파, 하고 애써 내쉬는 숨만 쉬면서요.

당신의 사랑은 이제 필요가 없어요. 단지 당신의 아가미를 이식 중이죠. 당신의 아가미로 다른 사랑을 할 거예요. 얄미워하거나 섭섭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걸로 당신은 느리게 내 속을 유영하면서 한때의 나를 가졌잖아요. 그러니 나도 큰 물고기가 되어서 당신처럼 어떤 이의 마음속을 자유로이 유영하고 싶어요.

날이 지는 것, 참 좋네요. 시간도 가고요. 시계는 필요치 않을 것 같아요. 나는 나의 시계를 멈추고 돌아 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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