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에 서러운 것 너무 쉬운 일이에요.
그가 떠나고 특정한 날들이 싫어졌어요. 핑계 삼아 명분 삼아 그가 연락을 취해올까 기다리는 이별한 후에 누구나 다 그런 흔한 사람이 되었거든요. 나는 내가 조금 안 흔해서 나를 좋아했는데, 그가 떠나고 발끝에 차이는 자갈돌이 되어버렸어요.
롤랑 바르트가 그랬는데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기다리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리게 된다고. 아무리 여유를 부려도 항상 너무 빠르다고. 저는 여전히 기다렸으니까 아마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인 채였던 것도 같아요.
아니면 자꾸 기다리고 싶어서 기다릴 이유를 내가 만들어 두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희망은 품으면 따뜻해지고 또 품은 희망이 토독하고 깨져서 무언가 태어날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마음이잖아요? 그러면 희망을 품고 있으면 나는 영영 엄마처럼 막연하고 힘들어도 기다릴 수가 있는 일이죠. 그래서 몇 개의 약속을 만들어 두었던 듯도 싶어요. 헤어지기로 한 날 말이에요. 지금 힘든 마음이 썰물처럼 가시고 뿌옇던 마음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 내가 보고 싶다면 연락해 주세요. 하고 새끼손가락, 문득 견딜 수 없이 내 사랑이 그리우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화해 주세요. 하고 새끼손가락, 내 생일에 미역국 끓여 주러 와요. 꼭. 하고 새끼손가락 걸었습니다.
그날 그의 새끼손가락이 백 개여도 모자랐을 것 같아요.
나는 아주 좋은 달에 태어났어요. 날씨는 적당히 따뜻하고 사랑을 확인하기에 좋은 오월에 태어났지요. 가정의 달이에요. 오월은 특별한 날투성이예요. 그리고 특별한 날은 명분 삼아 사랑을 확인하기에 적당하지요. 어버이 날엔 평소에 하지 못했던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해보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괜히 불자도 아니면서 절에 가서 절밥도 먹어보곤 하지요. 스승의 날에는 한참 찾아뵙지 못했던 감사한 은사님을 찾아가 덕분에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고 숙숙한 감사도 표현해 보고요. 그렇게 자꾸 오월은 따뜻한 마음을 확인할 날이 많아요. 나는 그런 달에 태어났지요.
아닌 척, 짐짓 기다렸어요. 그가 떠나고 헤어짐의 인사도 중간에 한 번 더 건넸는데도요. 혼자서 괜히 아주 많은 것들을 하고, 많은 운동도 해왔는데도요. 다가오는 생일 앞에서 아닌 척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 기다림이 마음을 옥죄어 와요. 나는 상상을 하는 사람. 생일 축하해요. 라고 연락이 오면 어떨까 상상을 해보아요. 그러면 말해줘야지. 하고 대사도 써놔요.
‘미역국은 소고기가 좋아요.’ 하고 말이에요.
아린 손가락 마디같이 연락은 없었죠. 없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조금은 실망 조금은 다행이었어요. 그가 떠나고 많은 쉼표가 있었는데요. 나와의 흔적을 지우지 말아줘요. 라고 약속했던 한 달, 그와 행복했던 추억을 많이 남겼던 그 집에서의 그가 이사 가는 날, 그가 우리 집 앞에 내가 쓰던 물건을 담은 쇼핑백을 두고 간 날, 그리고 생일. 이제 생각했던 마디들이 끝이 난 것 같아서 후련도 했어요.
나도 이제 그만 기다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생일에 서러웠지만 한 열 걸음은 앞으로 간 기분도 들어요.
얼마 전 석탄일 특별 원데이 요가 클래스에 갔다 왔어요. 그곳의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어요.
“불편함에 머무를게요. 너무 빨리 벗어나려 하지 않을게요.” 라고요.
그 말이 마음에 화살처럼 낮게 날아와 콕하고 박혔어요. 나는 그를 잊으려 너무 발버둥을 치고 있었구나. 그것이 자꾸 속에서 나를 더 아프게 하고 얽히게 했구나 하고요. 운동을 아주 많이 해보고 책을 아주 많이 읽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어쩌면 부자연스러웠겠구나 하고요.
앞으로는 자연스럽게 불편함에 머물러 보려고 해요. 그가 생각나면 그를 생각하고 그가 보고 싶으면 보고 싶어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모르죠. 또 새로운 사랑이 올지도.
몸도 마음도 아주 많이 다쳤던 계절이 끝나가요. 꽃이 피고 지던 어느 계절을 그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작년의 일기에 그런 말을 적었더라고요. 계절이 적당할 때 서로 너무 아프지 않게 헤어졌으면 좋겠다. 하고요. 너무 아프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아파서 또 다행이었던 것도 같아요. 왜인지 주변 사람들이 내 사랑을 듣고 부러워해요. “너는 너무 힘들겠지만 사실 너무 부러운 시절 같아.”라는 말, 어제도 들었어요. 근데 나도 그를 만난 시절과 후, 모두가 좋아요. 오래 걸렸지만, 은유처럼 열매를 얻었어요. 평생 조금씩 먹고 꺼내보아도 달고 향기로운 열매일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한 번도 맺지 못할 열매를 내가 그런 사랑을 해서 얻은 것 같아요. 감사히 잘 먹은 다음에 남은 씨를 내 발목 밑에 뿌리고 살아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