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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소라 껍데기가 필요한 달

by 송유성

치밀한 행복이 오는 순간은 의외로 평범한 것들이 더 많다. 나는 아주 오래도록 그가 내게 특별한 선물이 아닌 슴슴하고 별맛도 없는 일상이었으면 했다.


그를 만날 때 나도 그도 혼자 살았고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함께 밥을 먹고 놀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했는데, 나는 우리 집 보다 그의 집에 있으면 알 수 없이 안정적인 기분이 들곤 했다. 나는 그를 떠나보내고 왜 그렇게 그의 집에서 안정적이었나 생각해 보았다. 그가 편하게 있어서 그랬던가. 그의 모든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서 나까지 덩달아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었나. 그는 매사에 늘 경직되어 있었는데 그의 공간에서는 조금 그는 그답게 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그의 집에서 점차 자신을 자신답게 두는 방법을 깨달아갔다.

그날은 오전에 산을 갔다 온 날이었던 것 같은데. 산에서 고양이를 봤던가.


여름이라기엔 조금 지났고, 가을이라기엔 이른, 에어컨을 틀기에는 춥고 그냥 있자면 노곤한 열기가 차오르는 어느 한낮이었다. 오전부터 그와 함께 등산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대형 카페에 가서 빵을 잔뜩 사고 어딘가 구경을 하느라 꽤 걸어서 다리가 조금 뻐근해져서 돌아왔는데 여전히 한낮이었다. 다들 바삐 움직이는 한낮에 집에 있으면 시간을 산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많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시간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면 부자가 된 것 같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날 우리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이 있고 내가 있으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형광등이 꺼진, 해의 조도로만 의존하는 다소 어두운 거실 속에서 스미듯이 느끼고 있었다.


그 사람의 집으로 돌아가 그는 컴퓨터 방에 들어가 늘 하는 게임을 조금 했고 나는 등산 후에 늘 그렇듯 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를 꺼내와 영화를 틀었다. 그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나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서 각자의 행복을 함께 있는 공간에서 즐기는 것이 오히려 무척 나를 고양 시켰다. 이렇게 살면 그것이 굳이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도 사랑을 영영 느끼며 살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말과 행동의 확인 없이 존재로 충분한 것이구나. 하고서.


언제든 내가 찾지 못하는 물건을 찾아 줄 그 사람이 그곳에 있었고 그가 자신의 할 일을 끝내고 나에게 오면 안아줄 내가 있었던 시간이 안정된 마음을 성처럼 쌓았다. 사랑은 안정을 깔지 않고서는 오래 달릴 수가 없다. 안정은 권태를 가져다주어 때론 사랑을 오해하기도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은 우리가 함께 서로를 바라보는 마라톤을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그날이 지속되길 바랐다. 당신 삶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일상이길 바랐던 날이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곳을 갔고 아주 많은 것들을 했지만 나는 유독 무사한 그날이 생각난다. 권태감이 가득한 한낮의 미지근한 기온과 더 이상 모든 것을 함께하지는 않는 연인이 있던, 그러나 처음으로 느꼈던 당신과 내가 나누었던 믿음 같은 것. 그날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서로를 자신의 삶 속에 넣어주었던 날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지쳐가면서 이 관계를 끝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날 중. 새롭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는데, 무언가를 말로, 행동으로만 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나,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하찮은 서로를 안쓰러워해 주는데.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자고. 그렇게 너무 많이 힘들이지 않고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다 어느새 뒤돌아보면 문득, 당신은 저 강의 건너편에 서 있고 나는 여기에 서 있는 것을 알아서, 희미해진 서로의 실루엣을 향해. 가벼운 손 인사를 건네는. 그런 이별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네모난 모서리에 끼워두고 더 이상 둥글어지거나,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이게 맞는 겁니다.”를 수십 번 내게인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지 나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조금, 괴롭게 반복해 말하면서 떠나갔다.

이제 오월이 오고 있다. 그가 떠나고 후루룩 벚꽃이 피었다가 졌다. 비 오는 날이 다섯 번쯤, 내가 울던 날이 몇십 번쯤 지났다. 오월은 행복한 만큼 누군가는 외로워서 단단한 마음의 소라 껍데기가 필요한 달, 그가 나를 만나기 전의 무던함으로 삶을 이겨냈으면 하면서도 그가 조금은 외로워 하기를 바라는, 내가 태어난 좋은 날이 있는 달이 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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