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투정을 글로 적을 때

과도기

by 편린

번아웃을 처음 겪은 건 2년 전이었다. 첫 개인전을 열었던 해. 2주간의 전시가 끝나자마자 온몸에 쌓여있었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어림잡아 8개월 정도가 되는 시간 동안 한 곳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쏟으며 지낸 것이었다.
전시 공간을 계약하는 날로부터 매일매일 타이머가 나를 따라다니는 기분, 작품을 만들고 각종 홍보물을 만들어내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또 포토샵을 다루지 못하는 나는 주변에 디자인에 능숙한 친구나 지인들에게 부탁을 해야만 하니 늘 부담이 든다. 스스로 모든 걸 잘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기도 한 일.

전시를 철수함과 동시에 시원섭섭한 마음과 자꾸만 공허해지는 기분을 꽤 오랫동안 놓지 못하고 지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몸을 단장하고 싶지도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는 오랜 시간 함께 지내던 강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주면서 죄책감에 힘이 들었고 또 그것들을 숨기며 지내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쓰기도 했다.
친구들과 연말을 맞아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것 빼고는, 거의 한 달을 방 안에서 지냈다. 다른 작업을 하기도 싫었고 작업에 관한 생각조차 해낼 수도 없었던 상태로 스물여섯의 마지막을 보낸 기억이 있다.


살면서 처음 겪어본 번아웃이었다. 그 상태로 한 달을 보내고 다음 해 1월부터는 짧은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어 자연스레 움직임이 많아졌고 또 일상을 살다 보니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2년 동안은 별 무기력함 없이 잘 지내왔다. 올해 초, 처음으로 마라톤에 도전하면서 운동량을 늘릴 수 있었고, 체력이 좋아지니 당연히 작업량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을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날은 기운이 따라주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연락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면에서 부지런해지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 될 것 같았다.

항상 큰일을 치르고 나면 몸이 아프거나 기운이 없어지곤 했다. 애초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한 것도 아니고 전부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었음에도,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항상 지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며 그다음 단계를 늘 떠올리며 속으로 답답하기도 하고. 올해도 한 달간의 바쁜 농번기를 보낸 덕에 오랜만에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게 되었다.
다행히 아픈 데는 없었지만 같은 강도의 일을 매일 반복하다 보니 초반에는 항상 다급하고 가끔 쉴 틈이 보일 때면 꽤 오래 앉아서 멍을 떼렸다. 요즘에서야 일이 조금씩 줄어들고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7월 중순까지는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가족과 일을 해서 7월 한 달 동안은 쏟아지는 일들을 잘 처리할 수 있었고, 함께 얼굴을 맞대고 오랜 시간 보낼 수 있었던 건 정말 좋았다. 나이가 들면 가족과 마주 보는
시간들이 줄어든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요즘 들어 함께 하는 날들이 배로 늘어나는 것 같아서 웃는 날도 늘어난 것 같고. 생각보다 일을 하면서 하기 싫거나 불만이 생겼던 적은 없었고 힘은 들었지만 대부분 견딜 만큼의 수준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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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창의력을 샘솟게 하는 산뜻한 호기심 세포가 상당수 줄어들었고, 사고가 단순해졌다.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자고 하니 걱정이 많고 당분간은 작업실에 나가는 일이 명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 전부터 자꾸 불안한 기운이 몰려든다. 다시 작업을 하려고 하니 뭐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나의 일을 발전시켜야 하는지도 어렵다.
솔직히 한 달 동안 작업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일만 했지만 좋은 점도 꽤 많았다. 새벽과 낮 시간만 제외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쉬기도 했고, 기운이 빠지는 날에는 먹고 자고만 했어도 열심히 일했으니 만족했다. 집에서만 있는 덕에 강아지랑 산책하는 시간, 눈 맞추는 시간도 늘어난 것 같아서 좋기도 했다.

어느 날은 포장박스를 접다가 아주 잠깐 머리 위로 바람이 스치는데, 지금처럼 가족과 함께 일하면서 먹고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먹고사는 건 역시나 어렵다. 어려운 걸 몰랐던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지치고 외로운 것도 같다.

여러모로 과도기에 접어드는 시기에 올랐다. 인생에 답은 없지만 또 내가 하는 생각들이 전부 맞는 것도 아니다. 보통은 한 달이면 괜찮아지곤 했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갈지 궁금해진다. 일단 어떻게든 여름을 보내보자. 가을이 오면 나아지겠지, 아니라면 또 어떻게든 겨울을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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