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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리 각자의 영화관 Nov 06. 2024

B급 영화를 좋아해

지구를 지켜라!(2003) & 남자사용설명서(2012)


모든 B급 영화가 가치 있는 건 아니지만, 훌륭한 B급 영화는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나는 B급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이 글은 말하자면 최근 ‘핸섬가이즈’(2024)를 보고 좋아서 쓰는 B급 영화를 향한 나의 러브레터다.


제목과는 다르게 강아지가 제일 잘생긴 영화 ‘핸섬가이즈’(2024)


언제부터였을까? B급 영화를 향한 나의 짝사랑이 시작된 것은. 영화를 업으로 삼고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영화를 들여다보게 되면서 생각한 나의 좋은 영화의 기준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을 것 (그러나 강요하진 않을 것), 다른 하나는 영화 자체로 재미있을 것. 둘 다 충족한다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가 되는 거고 하나만 제대로 충족하더라도 나에게는 충분히 좋은 영화가 된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B급 영화는 무엇인가? 씨네21의 김진우 기자에 따르면 “저 예산으로 제작된 오락영화”다. 대표적인 예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나는 그의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렇게 호탕하게 재밌는 영화를 만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가 향하는 지향점이 무엇보다 확실하며 그 길에 뿌려진 떡밥을 완벽하게 회수한다. 나는 B급 영화가 그로서 이미 영화의 가치를 모두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B급 영화를 사랑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전형적인 클리셰 공식을 깬다는 것. 관객인 나는 그저 관객석에 앉아 영화의 문법을 마음껏 무너뜨리는 순간을 설레며 기다린다. 아무래도 큰 자본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영화에는 뻔하지만 안전한 공식들이 있기 마련인데, 비교적 작은 자본이 투입되는 B급 영화의 경우 조금 더 자유롭다. 부족한 환경에서 창의성이 나온다는 연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영화 제작에 있어서는 매우 동의하는 바이다. 자본의 한계가 주어지면 환경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고 그런 부분에서 A급 영화에는 없는 재미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한국에서는 B급 영화가 주류가 아니다 보니 온전히 ‘재미’만 추구하는 B급 영화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외길 인생을 걷는 감독들을 만나게 될 때면 더더욱 리스펙 하는 마음이 생긴다. 한국에서 B급 영화를 보고 가장 처음 충격을 받은 건 이원석 감독의 ‘남자사용설명서’(2013)였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든 생각은 "아니 이런 귀한 분이 어떻게 이렇게 각박한 곳에"였고, 영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감독의 이력을 검색해 봤다. 당시에는 한국 B급 영화가 더욱 귀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진짜였다. B급 영화를 많이 보고 즐긴 사람의 바이브가 느껴졌달까. 


‘남자사용설명서’(2012) 속 전설의 장면


정신 나간 스토리 흐름과 찰떡같은 오정세의 연기, 키치하지만 심미적인 비주얼, 거기에 비디오 시대를 향한 찬가까지. 비디오 대여점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환장할 수밖에 없는 취향 스트라이크존이었던 것. 


‘남자사용설명서’(2012)의 메인 포스터


그러나 슬프게도 나도 개봉 당시에 극장에서 보진 못 했다. 당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더라면 효과는 미미 했겠지만 내 SNS에라도 동네방네 홍보했을 텐데. 이 작품의 흥행참패에는 성인물 같던 포스터가 한몫했다고 생각한다만, 구 업계 종사자로서 어떻게 해도 마케팅하기 힘든 영화였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 차라리 웨스 앤더슨 식의 색감 예쁜 영화로 홍보했다면 그래도 잘 팔렸을까 어렴풋이 짐작만 해본다. 


최근 BFI 코리안 시네마 시즌 행사로 ‘지구를 지켜라!’(2003)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저주받은 명작, 다시 봐도 엄청난 이 작품은 지금 세상에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장르의 혼합과 파격적인 설정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까지. 지금 봐도 독특한 설정이 많은데, 20년 전인 그 당시에는 천지개벽할 설정이었을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2003)


영화 상영 후 이루어진 Q&A에서 장준환 감독이 회상하기를 ‘지구를 지켜라!’는 연출할 때도 다른 생각 없이 정말 영화 찍는 것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고 했는데, 영화를 보면서도 그게 느껴져서 관람이 더욱 즐거웠다. 가정에 불과하지만 이 작품이 흥행했다면 감독님의 이후 작품들의 모습이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감독을 맡고, 엠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가 출연하는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인 ‘부고니아(Bugonia)’도 내년에 개봉을 예정하고 있어 현시대의 리메이크는 어떤 모습일지 또 기대가 된다.


B급 영화의 붐은 온다! 주문을 외우듯 외쳐본다. 더 다양한 B급 영화가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그래서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마음껏 스크린에 뿌려보기를. B급 영화팬은 조금 더 많은 취향의 영화를 만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글쓴이 : 런던의 D

런던에서 영화 주변을 기웃거리며 살고 있다. 한국에서 영화 홍보마케팅 일을 했으며 영국에서 미디어와 관련한 짧은 공부를 마쳤다. 현재는 영화제, 영화관 등 영화 관련된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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