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리 각자의 영화관 Oct 30. 2024

로드 무비와 운전 수업

노매드랜드(2020)


자동차 액셀을 밟고 도로를 달린다. 발을 까딱까딱 들었다 놨다, 신호에 걸려 멈춰야 할 때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되고, 발끝으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누르며 속력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나의 운전 선생님은 자칭 고수들의 발 기술과 함께 앞 차와의 거리두기, 등을 쭉 펴고 바른 자세로 운전을 하는 방법 등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딱히 80km 이상 달릴 일은 없으니 절대 그 이상 속력을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며칠 으름장을 받아가며 습관을 들여서인지 나는 지금도 크게 급한 일이 아니면 딱히 속도를 내지 않는다. 다행히 큰 사고도 없었으며 장시간 운전을 해도 별로 힘들지 않다. 좋은 스승에게 잘 배운 운전 실력은 삶을 풍요롭게 함과 동시에 낯선 곳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아는 만큼 보여서일까, 영화 속 드라이브 장면은 좀 더 몰입하게 된다. 장소를 옮겨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로드 무비를 특히 좋아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일거다. 로드 무비 속 주인공들은 자동차에 몸을 싣고 여행, 도주 등을 중심 플롯으로 사용하며 여러 공간을 경유한다. 떠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을 통해 삶의 의미를 터득하기도 한다.



영화 '노매드랜드'(2020)의 '펀'은 추억이 깃든 도시를 떠나 작은 밴과 함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위의 세상을 달린다. 차에서 먹고 생활하며 광활한 자연과 자유로움을 느끼고, 삶을 스스로 선택한 노매드들을 마주한다. 주로 그들의 청자였던 '펀'은 떠난 아버지와의 추억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기억되는 한 살아있는 거다.”라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며 "기억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그리운 이들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 있다.



'펀'을 보며 처음 운전대를 잡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아빠와의 몽글몽글한 추억이다. 차가 필요하다는 딸의 요청에 우리 아빠는 작은 차를 준비했다. 그 차를 몰고 울산에서 꼬박 네 시간을 달려 여수로, 여수에서 다시 배를 타고 제주로 왔다. 내가 직장에 있는 낮 시간 동안 아빠는 낯선 제주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연수를 할만한 공간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 운전 수업이 시작됐다. 아빠는 성질 급한 나에게 애정 어린 쓴소리를 쏟아내며 운전을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특히 밤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고, 밤의 도로는 차도 많이 없고 어두우니 늦게 나가 다니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한 제주 도로의 특징, 직장생활의 고단함, 내일 먹을 저녁 메뉴와 도대체 엄마는 왜 그러는가라는 등의 주제로 웃고 떠들며 한적한 해안도로를 한참 내달렸다.




요즘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주 서쪽 도로를 달린다. 현실은 왕복 1시간 30분의 출퇴근길이지만, 환상적인 풍경 덕에 잠시나마 로드 무비의 주인공이 된 듯 가슴이 설렌다. 억새와 붉은 노을이 만발한 제주의 가을은 감동적이다. 차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와 라디오를 친구 삼으니 세상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노래 취향도 조금씩 깊어져 간다. 오늘 밤에는 사랑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그 시절 살가운 딸로 돌아가 이런저런 수다를 떨어보아야겠다.




글쓴이 : 제주의 Y

제주에서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하며 산다. 예술학교의 광고학도로 기획이나 마케팅 등을 접하고, 육지에서 짧게 독립영화사 인턴과 영화제 스태프로 일했다. 언젠가 본인이 사랑하는 제주섬에도 좋아하는 영화관이 생길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이전 20화 1인분의 단정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