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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대 줌마 May 10. 2024

K 장녀와 참외

아무튼 가족

맛 좋은 ○○참외가 왔어요

 ○○ 금싸라기 꿀참외가 한 봉지에 만 원만 원. ” 

과일 장수 트럭에서 노래하듯 리드미컬 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 어머이른 봄인데 벌써 참외가 나왔네! ’ 

작년에 만난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듯 반갑다

길을 가다 말고 샛노란 참외 앞에 멈춰 선다.    

 

참외가 조금 더 특별해진 것은 내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벌써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네내가 열세 살 때인가?

엄마를 따라 외가 제사에 갔다외할머니는 모처럼 만에 온 손녀에게 제상에 올렸던 몇 개 안 되는 참외를 

선뜻 내주셨다

맛이 기막히게 달았다참외 속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요즘 표현으로 맛의 신세계였다

사실 나는 그날 참외를 난생처음 맛보았다.  

   

 엄마는 참외를 먹지 않으셨다

“ 나는 속이 냉해서 찬 성질의 참외는 몸에 안 받아너나 어서 많이 먹어라.” 

참외 접시를 자꾸만 내 앞으로 미셨다     


나는 엄마말을 못 믿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혼자서 참외 한 접시를 뚝딱 먹어 치웠다다 비운 접시를 보자 집에 두고 온 동생들이 생각났다

나만 먹어서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서는 참외 먹은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며칠 후 과학관으로 견학 가는 날이다

아이들 견학 날소풍날은 작은 동네가 떠들썩하다

할머니의 꼬깃꼬깃한 쌈짓돈도 손주들 소풍날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할머니와 엄마가 주신 용돈을 합쳐보니 천 원이나 되었다.

앗싸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 기분도 잠시 슬슬 고민이 시작됐다.

‘ 천원으로 뭐하지천원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은 뭘까? ’ 

견학 내내 머리를 쉴새 없이 굴렸다   

  

‘ 맞아! 오늘 동네 장날이지! 동생들 참외 맛보여 주자. 히힛.’  

   

견학을 마치고 시장 과일전으로 냅다 달려갔다

노오란 참외가 오종종 사이좋은 형제들처럼 좌판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좌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참외를 세어 보았다

‘ 하나,...여섯.’

딱 여섯 개가 한 바구니다판지에는 천 원이라고 씌어 있다.

다행이다우리 식구가 여섯 명이니 딱 한 개씩 먹으면 되겠다.’ 헤헷

배시시 웃으며 주머니 속 돈을 만지작거린다.

할머니참외 주세요한 바구니 천 원이죠?”

내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밝고 경쾌했다.     


참외를 넣어 불룩해진 가방을 작은 어깨에 메었다

식구들과 참외 먹을 생각을 하니 무겁기는커녕 발걸음은 되레 가볍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집에 도착했다


엄마와 세 명의 동생들 앞에서 참외 개봉박두다

참외를 하나씩 하나씩 되도록 천천히 꺼냈다

하나,… 여섯

여섯 살 막냇동생이 귀여운 목소리로 함께 따라 센다히힛.   

  

엄마는 웬 참외냐고” 놀라 물으셨다.

“ 오늘 주신 용돈으로 샀지요헤헷

“ 너나 모처럼 맛있는 거 사 먹지뭐 하러 참외는 사 왔노?”

“ 동생들 참외 맛보여 주려고요히힛.”     

‘ 맏이가 저래서 다르나

 지 동생들은 용돈 준 거 싹 다 쓰고 왔더구만.’

엄마는 부엌으로 가시며 혼잣말을 하셨다.     


나는 엄마 마음을 다는 몰라도 웬만큼은 안다

엄마의 잔소리가 서운하기는커녕 흐뭇해서 씨익 웃음이 났다.     

당시 표현으로 살림 밑천 맏딸.

요즘 표현으로 장녀이니까    

 

그날은 엄마도 참외 한 개를 온전히 다 드셨다

나는 그게 좋았다

‘ 외갓집에서의 진실은 엄마가 참외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 히힛  

 며칠 전 외가에서 나 혼자 참외 한 접시를 홀라당 먹어버린 철없는 행동을 조금 이해받는 기분이다.


우리 여섯 식구는 좁은 방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 달달한 참외를 사각사각 맛있게 먹었다

도란도란 소풍날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우리 집에도 노오란 참외빛깔 같은 행복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가족을 생각이 애틋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 하나가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와 

내 마음을 따스하게 물들여준다.     


추억은 가는 게 아니라 오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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