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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대 줌마 Apr 26. 2024

아무튼 손자

손자라는 인생 최고의 선물

설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4대가 모여 차례 지낼 생각을 하니 이것저것 신경이 많이 쓰인다.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모시는 차례상이다. 시어머님께 심사받는 기분으로 차례상을 차례 냈다어머님의 눈이 채점관처럼 꼼꼼히 차례상을 훑어간다

탕국 무우는 크게 썰어야 자손이 크게 난단다.” 이십 년 넘게 탕국 끓일 때마다 하시던 그 말씀을 올해도 잊지 않고 하신다.

그만하면 크잖아요어머니’  직구를 날리려다 그만둔다며느리 삼십 년 내공에 이 정도 시어머니 잔소리쯤은 그냥 웃으며 패스다 패스.

(찌짐종류는 한 곳에 수북수북이 담아 놓아야 복스럽지이래 쬐매씩 깔아 놓으면 못쓴다못써! ” 이번엔 강펀치가 날아든다살짝 기분이 상한다참았던 내 입은 닭나발처럼 삐죽이 나온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공모자인 남편과 눈빛을 교환한다. 제사상 차리기 전에 남편과 의논해서 정한 것인데 딱 걸렸다. 남편이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얼른 한마디 거든다.

조상님이 뭐 차렸나잘 보이시라고 음식을 종류별로 펼쳐 놓는 게 낫지요옛날에는 제삿상도 작고 제기도 부족해서 한 곳에 수북하게 담았지이게 더 나아요엄마. ”

어머님의 낯빛이 급 어두워지신다.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무시고 차례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으신다. 상차림도 못마땅한데다, 하나뿐인 아들이 제 마누라 편만 들고 나서는 게 더 서운하신 듯하다     


집안 분위기는 얼음땡 놀이의 술래가 얼음이라고 외친 것 같다. 

정적이 감돈다. 아이들도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멀뚱멀뚱 눈치만 보며 말이 없다.  

“ 명절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기분이 언짢아지기 쉽다는데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나?” 유들유들 넉살 좋은 성격이 못 되는 나로서는 난감하다주방에 들어가 애꿎은 국솥을 국자로 휘휘 젓는다.

이십 년 가까이 맞벌이 하면서 제사드는 날엔 직장에 조퇴하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맏며느리의 숙명이라 여기며 힘들었지만 제사준비를 나름 열심히 배우고 도왔다. 퇴직하고 어머님이 많이 힘들어하시길래 우리집으로 모셔왔는데. 이제 육십을 넘긴 며느리에게 좀 맡겨 두셔도 좋으련만. 일일이 다 참견하시네.  내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 모양 빠지게. ’ 

부글부글 국처럼 내 마음도 끓어오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난데없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꼬까 한복을 입고 조막만 한 손으로 손뼉을 엇박자로 치며 네 살 난 손자가 노래를 하고 있다. 그것도 차례상 앞에서 생일 축하송을.

이거 동영상 찍어야 해!” 둘째 아들이 호들갑을 떨며 휴대폰을 급하게 찾는다식구들 모두 차례상 앞으로 하나 둘씩 모여든다. 손뼉까지 치면서 손자의 생일 축하송 노래에 맞춰 합창을 한다향불 앞에 서서 후마치 케이크에 촛불을 끄듯 부는 모습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진다떡이며 과일이 잔뜩 차려진 차례상이 손자 눈에는 어린이집에서 매달 하는 생일잔치쯤으로 비친 모양이다

어머님도 연신 벙글벙글 웃으시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신다

하하하 호호호거실 가득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번진다

내 꽁했던 마음도 스르르 풀린다


차례를 지내고 상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생각해 본다.

옛날에는 대가족이 한 집에서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자잘한 갈등이 생겨도 올망졸망 자라나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웃으며 마음 풀고 살아낸 게 아닐까 싶다.’ 

퍽퍽한 인생길에 손자는 선물같다. 

밥 먹다 말고 손자 이준이의 작은 등을 꼬옥 감싼다. 

 " 탕국 시원하게 잘 끓였네맛있다." 

어머님도 환하게 웃으시며 탕국 한 그릇 뚝딱 잡수신다.

 ‘ 어머님, 살아 계신 동안에는 어머님께 배운 대로 할게요. 히히.’

나는 쑥스러워 말로는 못 해도 마음으로 약속한다.

어머님과 나 그리고 남편,

서로 누가 옳다 그러다 말은 안 해도 서운했던 마음이 손자 재롱에 싹 다 녹아 내린 듯하다

다시 우리 집은 얼음땡 놀이의  '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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