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친구랑 집 앞에 있는 Monacacy creek(모나카시 계곡)으로 산책을 갔다. 내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친구가 차에서 내리며 두리번거린다.
이쪽으로 오라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까닥였다. 친구는 오려다 말고 멈춰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다가가 왜 안 오고 멈춰있냐고 물었다.
“루미가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오라고 할 때는 이렇게 해야지요”
하면서 반대로 손바닥을 하늘로 올리고 까닥거린다.
친구는 이야기할 때 손동작을 많이 사용했고 나는 낯선 동작들이 궁금했다. Fingers Closed(세 번째 손가락을 두 번째 손가락 위로 올림) 할 때 물어보았다.
“그건 무슨 의미야?”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요 즉 ‘행운을 빈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손가락 언어는 나라마다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다. 크로스 핑거가 한국인에게는 거짓말을 뜻하고, 중국인에게는 숫자 10을 뜻하고, 유럽인들에게는 행운을 뜻한다고 했다. 똑같은 동작이지만 나라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조심해야겠다.
두 번째 손가락과 세 번째 손가락을 동시에 양쪽 어깨 위로 올려 까딱일 때는 ‘강조’ 하는 뜻이라고 했다. 모양이 큰따옴표와 비슷해서 나는 스스로 그것을 ‘더블 강조’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자동차에 Tint(선팅)를 많이 하지 않는다. 아마 총기 소유가 자유로워서인 것 같다. 경찰은 운전자나 탑승자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밖에서 보여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운전자들도 상대방의 얼굴표정이 보여야 손으로 하는 사인 등 수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초록 불 직진 신호일 때 대부분 비보호 좌회전을 할 수 있다. 내가 좌회전을 하고 싶다는 손짓을 하거나 상대방이 나에게 좌회전을 허락한다는 손짓을 해주면 나는 안심하고 좌회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길을 놓쳐서 급하게 다른 차 앞에 끼어들어야 할 때도 손짓으로 내 급한 상황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면 대부분의 차들은 양보해 준다. 아마 내가 살았던 곳이 시골이어서 여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도시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서울처럼.
우리나라는 차가 우선인 나라라면 미국은 사람이 우선인 나라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라도 자동차는 그 사람이 다 건너갈 때까지 멈춰서 기다려 준다.
동네에 있는 민시 트레일 (길 이름)을 혼자 걸을 때였다. 갑자기 뒤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On your left.”(당신의 왼쪽에)
뒤를 돌아보니 자전거를 탄 사람이 나의 왼쪽으로 지나간다. 그는 나를 지나쳐 앞으로 달리더니 아무도 없는 갈림길에서 오른손을 옆으로 쭉 뻗는다. 이제는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신호를 한 것이다.
운전을 하다 보면 신호등이 없고 Four-Way Stop Sign만 있는 사거리가 종종 보인다. 이런 사거리를 지날 때 처음엔 불안했다.
‘아니, 사거리인데 신호등이 없으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너무 위험한데?’
하지만 자주 이용하다 보니 시간도 훨씬 절약되고 오히려 더 편했다. 먼저 사거리에 도착한 순서대로 멈춰있던 차들이 가면 된다. 그런데 가끔 상대방 차가 먼저 온 건지 내가 먼저 온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상대방에게 먼저 가라고 손 신호로 양보해 준다.
운전자들이 모두 상대방 차를 보고 있기 때문에 손으로 보내는 신호는 다 잘 보인다. 운전대를 손으로 잡은 채 한쪽 손바닥을 까닥이며 먼저 가라고 할 때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양보해 줄 때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어 오른손 전체를 크게 흔들며 정중하게 ‘먼저 가세요’ 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손바닥이나 검지 손가락만 까닥거리는 것이 살짝 ‘먼저 가세요’라는 애교 있는 손짓이라는 것이다. 나처럼 오른손 전체를 흔드는 것은 ‘서둘러 빨리 지나가세요’라는 즉 서두르라는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이 양보해 주었을 때, 나는 고개를 깊이 숙여 땡큐를 했다. 보통 미국인들은 고개는 숙이지 않고 손만 살짝 들어 감사 표시를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지나치고 과도한 표현이라는 걸 한참을 살고 난 후에 알았다. 그냥 오른손만 들어 올리면 되는 거였는데 그것도 처음엔 잘 안 됐다. 그래서 한동안 고개를 꾸벅 숙이는 동시에 손도 같이 올리는 더블 감사 표시를 하기도 했다.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고개는 숙이지 않고 손만 들 수 있게 되었고 돌아올 무렵에는 엄지 척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횡단보도 앞에서 길을 건너려고 하는데 차가 너무 빨리 달려왔다. 나는 기다려 주었다. 그 차가 내 앞에 가까이 다가올 때쯤 창문이 열리더니 운전자는 활짝 웃으며 두 번째 손가락을 까닥였다. 나에게 먼저 건너가라는 것이다. 나는 고맙다며 엄지 척을 해주었다.
버벅거리지 않고 손으로 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쯤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 아파트 앞에서 좌회전을 하려고 신호를 넣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오른쪽에서도 좌회전 신호를 넣고 아파트로 들어오려는 차와 만났다. 그 차가 나에게 먼저 가라고 하는 것인지, 아닌지 신호만 넣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는다. 답답하다. 앞 유리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먼저 천천히 좌회전을 했다.
양보해 줘서 고맙다는 손 신호를 해주고 싶은데 그 차의 틴트가 너무 진해 운전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나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손으로만 감사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니다. 여기는 한국이니 다시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두 개를 같이 할까?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