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로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치르던 중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 습관적으로 셀폰을 켜고 뜻을 찾아보려 한 바로 그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저쪽에서 바쁘게 자기 일을 하고 있던 직원이 나에게 다가와 근엄한 표정으로 말한다.
“You’re out for illegal cheating. (당신은 불법적인 치팅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1년만 살고 가려고 ‘국제운전면허증’을 들고 왔다. 그런데 1년을 더 머무르며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운전을 했으니 크게 어려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펜실베이니아주 면허를 따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인터넷 DMV 사이트에 들어가면 예상 문제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그것만 몇 번 풀어보면 된다고 정보를 주었다.
먼저 집에서 가까운 DMV에 가서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접수하고 조그만 책자를 무료로 가져왔다. 집에 와서 단어를 찾아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필기시험을 보러 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시험을 보기 시작하는데 아이고 생각보다 많이 떨린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몇 문제는 그냥 건너뛰어도 괜찮으니 긴장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풀기 시작했다. 예상 문제지에서 한 번쯤 본 문제들이다.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됐건 결과는
1차 필기시험 탈락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시험을 보고 있을 때는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직원도 바쁘게 자기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봤을까? 셀폰을 꺼내 보는 게 치팅이라는 것도 몰랐다. 단지 모르는 단어만 찾아보려 했을 뿐 치팅할 의도는 맹세코 없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다음 날 필기시험을 또 접수하고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DMV에 갔고 이번에는 합격이다. 2차 주행시험을 보려고 하는데 이건 좀 복잡하다.
친구들은 내가 사는 동네의 DMV는 깐깐하고 불친절하니 다른 곳에 가서 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알려준 곳은 인기가 좋아서인지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다.
나는 빨리 면허를 따고 싶어 그냥 우리 동네에 신청했다.
주행시험을 보러 간다고 했더니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해경 씨가 자기 경험을 말해 주었다.
처음 주행시험 보는 날, 해경 씨는 자기 차에 앉았고 감독관이 옆에 앉았다고 했다. 시동을 켜고, 안전벨트를 매고, 막 출발을 하려는데 감독관이 말했단다.
“emergency (비상사태)”
비상사태라니 그녀는 갑자기 무슨 상황인지 놀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고 했다.
“emergency”
그녀는 도대체 뭐가 비상사태라는 건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안절부절 앉아만 있었단다.
그러자 감독관은 말없이 차에서 내렸고, 잠시 후 그녀도 뒤따라 내렸다고 했다. 떨어진 것이다. 나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 왜 그랬어? 비상사태라면 얼른 비상 버튼을 눌러야지.”
아주 오래전에는 안전벨트를 안 매서 출발하자마자 바로 떨어졌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즈음엔 우리나라도 안전벨트 착용이 의무화되어 있어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경 씨는 말했다.
“언니, 비상사태를 준비하세요.”
“알았어. 비상사태.”
드디어 주행시험 날이 다가왔다. 내 차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비상사태’를 준비했다. 그러나 나에게 비상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곧 출발했고 좁은 길에서 큰길로 나가는 곳에 이르렀다. 감독관이 말했다.
“Turn Left”
“OK”
나는 속도를 낮추고 조금씩 앞으로 나가서 완벽히 멈췄다. 매뉴얼대로 먼저 왼쪽을 보고,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고, 다시 왼쪽을 살폈다. 속으로 1, 2, 3초를 세었다. 정확히 3초를 쉬고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아무 문제 없이 부드럽게 출발지에 돌아왔다. 나는 완벽한 합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탈락이란다.
‘Completely Stop’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 완벽하게 멈췄다. 고개도 최대한 쭉 빼서 확실하게 돌려 확인했다. 정확하게 3초를 멈추고 출발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눈동자만 돌려 백미러나 룸미러로만 확인하면 탈락이라는 걸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모든 걸 완벽하게 했는데 왜 탈락이라는 건지 물어보았다.
“정차할 때 완벽하게 Stop 라인에 정차해야 합니다. 그리고 출발할 때 조금씩 앞으로 나가면서 주위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Stop 라인보다 훨씬 앞으로 나가서 멈추었습니다.”
너무 일찍 멈추면 옆에서 오는 차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옆 차들이 보일 정도까지 충분히 앞으로 나가 멈췄던 것이다. 역시나 깐깐했다. 친구들의 조언을 들었어야 했다.
다시 집에서 가까운 여러 곳의 DMV를 찾았고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곳에 접수해서 합격했다. 합격 후, 면허증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는 직원이 웃으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증명사진 찍을 때 웃으면 안 된다. 그는 몇 컷의 사진을 찍어주고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라 했다. 면허증 속의 나는 활짝 웃고 있었다.
면허증을 손에 들고 나오는 데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다. '3전 2패 후의 1승이 아니던가!’
나도 모르게 크게 웃으며 손을 옆으로 파닥거렸나 보다. 저 앞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함박 미소를 지으셨다.
“면허 딴 걸 축하한다. 아주 좋아하는구나, 너는 인형처럼 예쁘구나.”
면허증을 땄는데 예쁘다는 칭찬까지 들으니 발걸음은 훌훌 날아다녔고 면허증 딴 얘기를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교회에서 만난 분이 의아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왜 그런 고생을 했어요? 펜실베이니아주와 한국은 운전면허상호인정협약이 체결되어 있어서 한국면허증이 있으면 바로 펜실베이니아주 면허증으로 교환해 줍니다.”
해경 씨를 만났다. 내 주행시험의 결과가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면허증을 보여주었다.
“오, 언니 축하해요. 고생했어요.”
해경 씨가 호들갑스럽게 하이톤으로 기뻐해 주었다. 일단 축하를 받은 다음 말했다.
“해경 씨, 근데 이제는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면허증을 따지 않아도 된대.”
"왜요?"
내 설명을 들은 해경 씨가 박장대소했다.
“복잡한 운전면허를 딸 필요 없다고, 굳이 따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따고야 마는 나는 그런 여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