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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Aug 27. 2024

콧구멍이 어는 이 느낌

그리웠을 수도

   나는 왜인지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다. 이걸 끝까지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는 마음과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긴 어렵지 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합쳐진다. 뭔지 모르니까 일단 찍먹 해봐야 하는 고집이 생길 때가 있다. 이를테면 멕시코여행하다가 수행하는 심정으로 머리를 밀어버렸다던가 태국 로컬미용실에서 현지유행스타일로 커트를 한다던가, 브레이크도 잘 못 걸면서 호기롭게 내리막길에서 보드를 탄다던가. 이거 끝까지 하면 뭐 될 텐데 하는 생각이랑 기왕 한 김에 결과를 보자라는 마음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삭발한 머리 위로 뜨겁게 내리쬐는 남미의 태양으로 온열질환에 걸릴뻔하고 내리막 가속도를 못 이기고 보드에서 뛰어내려 구급차에 실려가는 등 삶의 기술이 부족한 결과물들이 좀 있다.


  겨울 친구와 강릉에 갔다. 사둔 기차표의 기차시간까지 시간도 남고 차도 렌트했겠다 나는 갑자기 안반데기에 꽂혀 전망대 근처에 차를 세웠다. 신발은 미끄러운 반스. 얼마 전 내린 눈이 20-30센티 두께로 쌓여있고 사람이 지나간 자리는 번들번들하게 다져진 가파른 언덕과 내리막길을 일단 올라갔다. 뒤를 돌아보면 기울기가 포대하나만 있으면 신나게 눈썰매를 탈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게 덮인 언덕과 침엽수에 핀 오래되고 단단한 눈꽃, 시공간을 뒤틀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날개를 돌리는 풍력발전기가 내는 소리가 부웅부웅 들려온다.


  여름에 이곳에 가면 은하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안반데기에 다녀온 후 찾은 정보이고 강릉에 간 김에 갈만한 곳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이 지명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구글에 안반데기 은하수를 검색하면 꽤 멋있는 사진들이 나온다.) 예전에 친구들과 백두대간트레킹을 하다가 닭목령 쪽에서 안반데기를 슬쩍 들렀는지 지나쳤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역시 기록을 안 해두면 오늘 먹은 점심도 기억나지 않는다) 안반데기 지명만은 마음에 남아있었나 보다.


  해발 1,100미터에 위치한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이곳은 때마침 내린 폭설로 마을과 산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있다. 고양이나 개조차 땅 위를 밟지 않은 듯 표면은 아이싱이 잘 된 케이크처럼 완벽하게 흰색으로 두껍게 발라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입맛을 다셨다. 백설기도 좋고 케이크도 좋으니 뜨끈한 차에 한 조각 먹고 싶다. 겨울바다를 헤집고 다니느라 차가운 몸에 (빌린) 차량의 '엉따기능'은 설경이고 뭐고 따뜻한 실내에서 뒹굴고 싶은 유혹을 안겨주었다. 안반데기 카페 근처에 차를 주차해 두고 올라갈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우리는 올라갔다. 가야 하는 길은 대략 800m, 올라갈 때는 전망대가 가까워 보였는데 하도 소심하게 걸어서인지 왕복시간이 은근히 걸렸다.

올라가면서 나에게 미끄럼방지 아이젠이 있었더라면 이까짓 언덕 따위 단숨에 올라갔을 텐데(물론 아이젠을 착용한다고 해서 부족한 신체능력이 올라가지는 않는다.)라는 생각을 했다. 행여나 미끄러진다면 이 얼음길을 타고 쭈우욱 내려가서 설원에 푹 꽂혀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계속했다(오히려 좋아). 날은 맑아서 겨울하늘 특유의 쨍한 파란색이 흰색과 대비되어 아름다웠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광활해 보이는 언덕을 내려다보고 또 가야 할 길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경사가 심한 곳에서는 미끄러울까 봐 일부러 눈이 쌓여있는 곳을 골라 걷기도 했다.


  숨을 들이쉬면 설탕 같은 눈알갱이가 바람에 섞여 폐까지 들어온다. 겨울에 산행을 하던 생각도 나고 이 콧구멍이 어는 듯한 느낌, 그리웠는지 모른다. 겨울이니만큼 새해맞이 목표 등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몸은 뜨끈하게 열이 나고 머리는 시원한 상태가 되었다. 풍력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하도 커서 조금 정신이 없었지만 우리는 무사히 일출전망대에 도착했다.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에 웹툰에 나오는 강조선이나 효과선 같은 구름이 형성되었는데 나는 이곳의 기운이 영험하다며 너스레를 떨면서 크게 심호흡을 하라며 친구를 다그쳤다. 우리는 허파에 찬공기를 가득 채운 후 내려왔다.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과 눈과 마음에 가득 찬 설경을 안고 카페에 들어갔다. 따뜻한 모과차를 한잔 시키고 창밖의 설경을 바라보았다. 카페 벽에는 안반데기의 역사와 사진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켠에는 안반데기 풍경을 찍은 엽서도 팔고 있었다. 심한 경사로 오직 삽과 괭이를 든 사람의 힘만으로 돌멩이를 걷어내고 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사람의 의지와 노동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오늘 저녁은 냉차에 새하얀 케이크를 한 조각 먹으면서 그때의 설경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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