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먹방
언제나 그렇듯이 탑승 시간 전 3분 정도를 남겨두고 많은 일을 처내고 승강장에 도착했다. (많은 일이라고 해봤자 빠르게 걸으며 역 밖의 비둘기를 관찰하고, 역 안으로 들어와서는 화장실에 들르고, 커피를 사고, 아침으로 먹을 것을 사면서 더 맛있는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는 것이다). 커피와 빵을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 빵집으로 들어가 역시 빠르게 목표물을 훑는다. 오늘 눈에 들어온 것은 뽀얗고 촉촉해 보이는 쌀가루로 만든 베이글에 검은깨가 콕콕 박혀있는 빵이다. 냉커피를 받아 손에 들고 찰랑거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곧 기차에 올라타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잠이 덜 깬 머리로 멍하니 이 생각 저 생각을 했으면 차라리 나았으련만 가을옷을 좀 사볼까 하고 싸구려 인터넷쇼핑몰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러다 지루해져 숏폼을 시청했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다 스마트폰 화면에 빠져버린 눈알을 두 개 건져 올려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밖으로는 노랗게 익어가는 벼가 푸른 초목과 높은 하늘이 어우러져있다. 완연한 가을이다.
찌는듯한 여름에 비해 온도는 많이 낮아졌지맞 한낮의 태양은 내내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와 모자를 써도 시력을 잃어버릴 것 같다. 빵 먹은 지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역 근처에 있는 수제비집이 맛있다길래 들를 수밖에 없었다. 얇게 뜬 수제비에 김치와 콩나물을 넣어 시원하게 끓여낸 수제비와 참치김밥을 주문했다. 멸치육수를 진하게 냈는지 국물이 정말 칼칼하고 시원하다. 곁들여먹는 반찬은 김치와 깍두기와 단무지가 나왔는데 모두 아주 시큼하게 익었다. 신 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잘 맞았다.
여행을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지만 할 일을 마치고도 돌아오는 기차시간까지 4-5시간 정도가 있었으므로 관광지로 향했다. 벽돌색 버스가 끼익 하고 와서 섰다. 뭔가를 붙잡기 전에 버스가 출발한다. 차체가 엄청나게 흔들린다. 이것이 j 시내버스의 바이브인가. 영화 매드 맥스를 연상케 하는 거친 운전솜씨, 급정거와 급출발의 콤보로 창자가 뒤집어지는 것 같았지만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던 건 땅을 밟고 빵집을 보는 순간 진정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빵집으로 들어갔다. 이 빵집은 지역의 거대한 빵집으로 초코빵이 유명하다. 유명관광지에 가서 팥빙수를 먹겠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않고 초코빵을 미니사이즈로 고르고 초코소라빵을 집어 들고 나왔다. 목적지로 걸어가면서 다 먹긴 했지만.
유명한 관광지는 한산한 편이었다. 잔뜩 부풀린 대여한 한복 치마 아랫단을 잡고 몇 명의 관광객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을 뿐 월요일에 쉬는 가게가 많은 건지 상권이 많이 죽은 건지 거리가 조용했다. 위장으로 들어간 초코빵과 초코소라빵을 느끼며 거리를 걸었다. 눈이 부시고 목뒤가 따가운 것만 빼면 아주 걸을만했다. 아니 걸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가을의 어떤 박자감 같은 것이 느껴져 좋았다(2, 4에 강세였나, 1,3이었나). 경쾌하게 걷다 보며 계획한 곳에 도착했다. 통팥과 흑임자로 맛을 낸 놋그릇에 담긴 팥빙수집. 이것을 여름 내내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다가 이제와 먹는구나. 역시 사람의 소원은 언젠가는 이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통창 밖으로 아주 아담한 정원이 보였다. 한 직원은 그곳에 기다란 호수로 물을 주고 있었다. 장독대, 장독대 뚜껑 같은 물건과 어우러져 물기를 머금은 초록식물이 싱그럽게 보인다. 나도 저만한 정원을 가지고 싶었는데 지금은 뭘 가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진 것 같다. 나왔다. 내 여름의 소원! 놋그릇에 담긴 팥빙수. 곱게 간 얼음 위에 흑임자 가루를 푸짐하게 얹고 달지 않게 졸인 통팥과 흰 찹쌀떡을 잘라 얹었다. 곶감을 잘라 넣은 수정과도 같이 나왔다. 싹싹 긁어먹고 마시고 만족하며 나와 거리를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노을이 졌다. 한옥집이 즐비한 한산한 거리에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멈춰서 노을을 눈과 카메라에 담았다. 역시 노을은 어느 곳에서 봐도 좋다.
*역시 또 먹는 이야기만 잔뜩 해버린 여행기가 되었습니다. 휴일이 많은 10월의 첫째 주 가을을 최고로 만끽하는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가을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