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다운로드 가능?
눈을 깊숙이 찌르는 것 같은 가을햇빛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나 포함 친구 3명은 영농후계자, 정확히는 과수원 후계자의 추수를 구경하기 위해 충청도로 향했다. 과수원에 도착하자 은색으로 번쩍이는 깔개 위로 새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주력상품인 사과 말고도 농장 근처에 갖가지 과실나무들이 빙 둘러 서 있다. 대추나무에 대추가 가득 열려 가느다란 가지가 휘어진다.
농장에는 충성스럽지만 까불거리는 턱시도 고양이 한 마리와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지만 어딘가 달관한 듯한 삼색고양이가 있다(까불거리는 고양이는 삼색고양이의 아들이다.) 주인들이 사과밭에 가서 일을 하고 있으면 따라와서 신나게 놀다가 나무 위에서 한잠을 자기도 하고 참새나 벌레를 잡으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해가 넘어가 주인들이 퇴근할 무렵 고양이도 따라 나서 뛰거나 걸어 농막으로 온다고 한다. 그날 내가 관찰을 해본 결과 까불냥은 사과밭에서 갖은 재주넘기를 하며 하루를 보내다가 퇴근시간이 다가오면 기가 막히게 알고 갈채비를 마치고 퇴근을 채근하는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고양이란 동물은 개처럼 주인과 나란히 걷는 법은 별로 없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며 결국은 주인과 도착점을 같이 찍는다. 미모의 삼색고양이는 내킬 때만 사과밭으로 출근하고 그 외의 시간은 창고의 아늑한 장소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잔다고 했다. 넓은 농장을 안방처럼 하얀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다니면서도 배변은 꼭 농막의 자기 화장실에서 한다고 하니 고양이들은 참 알다가도 모를 생명체다.
과수원 후계자와 과수원 주인님의 수확을 구경하는 것이 목적이긴 했으니 아무것도 안 하고 멀뚱 거리 기는 아쉬워서 고양이손이지만 우리도 거들기로 했다. 여기저기 주렁주렁 열린 대추를 따고 손에 닿지 않는 대추는 긴 장대를 이용해 잘 털어준다. 먼저 나무 밑에 커다란 방수포를 깔고 기다란 장대를 손에 쥐고 휘둘러 본다. 익숙한 도구가 아니라 각을 잘 못 잡다가 그래도 괜찮은 각도를 파악해서 완전히 빨개진 대추와 녹색과 빨간색 사이의 대추를 여러 개 딴다.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열매가 아니라 애꿎은 이파리만 뜯겨 나온다. 대추 수확을 어느 정도 갈무리 해둔 후 이제 사과밭에 투입되었다. 사과를 따는 일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거나 멀쩡한 과실을 내가 만져서 퀄리티가 떨어질까봐 걱정이 됐다(나는 자타공인 마이너스의 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괜히 일하는 사람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을 시키거나 까불이가 어디 있는지 찾고 잔심부름을 했다.
별로 한 것은 없어도 왔다 갔다 서있다 앉아있다 하면서 칼로리를 꽤나 소비했기에 상당히 출출해지는 시점 뭔가를 먹으러 가자는 반가운 제안이 들어왔다. 우리의 새참은 태국음식이었다. 읍내로 나가 태국음식점에서 새우팟타이와 똠양꿍 이런저런 것을 주문해 먹었다. 농장에 인력을 제공하는 사람들 중 태국 사람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음식점인 듯했다. 다시 농장으로 돌아오니 사과밭 주인님(친구 어머니)이 우리가 딴 사과를 찬물에 쓱쓱 씻어서 칼로 잘라주셨는데 세상에 사과가 이렇게 달고 아삭아삭할 일인가. 농막 근처 그늘의 의자에 널브러져 앉아 사과와 대추를 씹고 삼키며 주변에 짙게 깔린 가을을 만끽했다. 가을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차고 공기는 건조해서 상쾌하다. 이맘때만 맛볼 수 있는 축복 같은 날씨다. 마침 오늘 날씨가 그날의 날씨와 습도와 비슷해 일일농장체험기를 써봤다. 이런 날씨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가 햇빛과 바람을 쐬어야 한다. 지난주 목요일을 기점으로 거의 10도가 떨어져 버린 날씨에 황당하기도 하지만 피부에 닿는 바람이 너무 좋아 이 가을을 계속 계속 연장하고 싶다. 아니면 어디에 좀 저장해 둘 수는 없나? 이 햇볕과 바람과 온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