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 주니페로 한국판 세트장 같달까
이곳에 방문한 것은 아마 두세 번쯤이고 방문하면 언제나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크고 휘황찬란해서 놀라곤 한다. 바닷바람이 슬금슬금 불어오고 시끄러운 폭죽소리가 나고, 떠들썩한 유흥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고 사람들은 어딘가 들떠있지만 영화의 세트 같다라던가 누군가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가상의 장소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휴일을 앞둔 평일, 콧바람을 쐬며 구운 조개구이에 소주잔을 기울일 요량으로 놀러 나온 연인, 친구, 가족들이 꽤 많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따라 즐비한 조개구이집에는 빈자리가 더 많고 텅 빈 오락실에는 행인의 주의를 끌기 위한 기계식 음성이 랜덤으로 들려온다. 그래도 놀이기구 쪽에는 꺅꺅 소리 지르는 높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스무 살에 클럽에 가서 펑크공연을 보고 피시방에서 밤을 새우고 지하철을 타고 이곳으로 왔다. 그때는 내가 술도 잘 마시고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바이킹을 타는데 위에서 내려올 때마다 그 속도감에 짜릿한 게 아니라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스릴과 공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디스코팡팡에 도전했다. 디제이의 약 오르는 말투와 정신없는 댄스음악과 함께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내 몸뚱이를 추슬러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디스코팡팡을 탄 듯이 이리저리 머리를 휘저으며 잠이 들었다.
오늘 월미도에 가게 된 것은 날씨가 더 추워지기 전에 월미도에 가서 조개구이를 먹자는 친구의 제안 때문이다. 이리저리 같이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차일피일 미뤄지다 '오늘 오후 출발'이라는 극적인 타결을 오늘 보고 일단 출발했다. 인천으로 가기 전 일어나서 별로 먹은 기억이 없어서 근처 커피집에서 두유라테와 샌드위치를 포장했다. 친구를 만나서 빌려둔 공유자동차에 탔다. 나는 운전을 할 줄 알지만 산만하고 신호를 잘 안(못) 보므로 운전대는 친구가 잡았다. 한 군데를 더 들러 친구 두 명을 픽업했다. 월미도까지 가야 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시간이 늘어지다 보니 어느덧 퇴근시간이 가까워져 차가 막힐 것으로 예상됐다. 아니나 다를까 인천까지 가는 길은 세 시간이 걸렸다. 막히는 차 안에서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다가 겨우 도착했더니 시간은 일곱 시 십분. 밥 먹기 좋은 시간이다.
우리는 플라스틱 야자수와 알록달록한 알전구로 장식된 루프탑에 앉아 연탄불에 석쇠를 올리고 가리비와 조개를 얹었다. 가리비에는 빨갛고 파란 피망이 고명으로 얹어져 있다. 가리비에 모차렐라 치즈를 얹고 초고추장을 한 바퀴 돌려준다. 치즈가 살짝 녹았을 때 가리비 속살을 뒤집어 반대쪽도 잘 익혀준다. 연탄불에서 나오는 열기와 10월의 '지금이야 날씨'는 정말 잘 어울렸다. 친구들은 오랜만에 캠핑 온 것 같다며 좋아했고 귀찮은 장비 세팅 없이 앉아서 구워 먹기만 하니 캠핑보다 오히려 좋다고도 볼 수 있다. 역시 한국인은 치즈의 민족이라 가리비에 치즈를 뿌려 먹어도 맛있고 조갯살을 치즈퐁듀에 찍어 먹어도 맛이 좋았다. 세 시간 걸려서 나온 보람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며 기본안주로 나온 오이와 당근스틱을 씹으며 가리비 구이를 추가해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거리를 잠깐 걷다가 친구가 비행기 격추 게임을 하고 싶다고 해서 다 같이 오락실에 들어갔다. 비비탄 총쏘기 게임, 좀비 총쏘기 게임, 테트리스, 비행기 격추 게임, 스트리트파이터, 펌프 등 추억의 오락기계가 놓여있었다(이 기계를 살 때는 꽤 비쌌을 텐데 유지는 될까 궁금해졌다). 친구 두 명은 좀비 총쏘기 게임을 하고 나와 친구 한 명은 에어하키를 했는 데 결과는 6:1(물론 내가 1이다). 좀비들을 다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지 친구 두 명은 총쏘기에 전념하고 있고 나는 오락실 근처를 걸어 다니며 어딘가 가상세계 같은 이곳을 즐겼다. <블랙미러> 시리즈의 샌 주니페로 에피소드의 한국판을 찍는다면 여기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기계가 관리하는 망자들의 서버,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의 사후세계, 영원한 삶이 기다리는 가짜 낙원.
좀비 특공대 중 한 명은 총을 들고 있느라 어깨가 아프다고 했고, 한 명은 방아쇠를 당기느라 검지손가락이 아프다고 했으며, 한 명은 치즈를 너무 많이 먹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다며 허허허 웃고 월미도에 얽힌 각자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