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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Jul 30. 2024

만리포 신비의 경사로

빙글뱅글 돌아가는 만화경

  집에 왜인지 스케이트 보드가 세 개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는 돈 주고 산거고 하나는 누가 쓰던걸 받았으며 하나는 선물 받은 것이다. 돈 주고 산 것은 카버보드로 랜드서핑 즉 땅 위에서 파도를 타는 기술을 연습하는 보드다. 파도도 잘 못 잡는데 파도타기 기술이 웬 말인가 싶지만 카버보드는 생각보다 매력이 있다. 무릎에 살짝 힘을 주며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라보면 기가 막히게 스무스한 턴을 하면서 나를 데려간다. 거기에 살짝 경사가 있으면 상쾌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퇴근 후 자주 보드를 들고나갔다. 킥보드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들 틈에서 바람을 가르며 좁은 공터를 나눠 쓰며. 그해 겨울이 될 때까지 열심히 타러 다녔다. 심지어는 기물이 있는 스케이트장을 검색해서 가기도 했다. 쫄보라서 경사가 큰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만만한 경사이거나 완만한 반원의 기물에서는 넘어져도 침 발라가면서 탔다. 말로는 ‘지금 뼈 부러지면 잘 붙지도 않는다.’라고 하면서 잘도 탔다. 잘 타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탔다. 조금씩 지켜만 보던 친구들도 카버보드를 같이 타기 시작했다. 태안 만리포에 가면 카버 보드를 타기 좋은 광장이 있다. 만리포는 만리포니아라는 별명이 있는 서해안의 서핑스폿이다. 나는  파도가 있거나 없거나 기회가 되면 간단한 캠핑장비를 꾸려서 만리포로 갔다.


   캠핑장에 텐트를 패킹해 놓고 신이 나서 보드를 들고 나왔다. 그날따라 평소 타던 광장 말고 아스팔도 도로로 나왔다. 살짝 경사가 있긴 했지만 뭐가 씌었는지 여기서 타자며  친구들을 부추겼다. “여기 경사 좀 있는 것 같은데? ”친구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 나 탄다.” 카버보드는 친구에게 빌려주고 차에서 내내 굴러다니던 스케이트보드를 발밑에 놓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바람도 좋고 날씨가 너무 좋았

을지도 모른다. 카버도 아니고 브레이크도 잘 못 거는 일반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경사를 내려왔다. 어라라. 생각보다 경사가 있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다. 이러다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빨리 스캔을 해보니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차량이 갑자기 이동할 수도 있겠다. 양 쪽의 도로갓길에는 전봇대가 보이고 쓰레기들이 뒹굴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더 가속도가 붙기 전에 뛰어내리자라는 비합리적인 생각이 들었다.


  낙법을 배워뒀으면 좋았을 텐데. 뛰어내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배경이 보이더니 별이 반짝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암전. 완전히 검은색.

‘영화에서 보던 블랙아웃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나는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몸이 흔들리고 누군가 내 골을 잡고 흔드는 느낌이 든다. “보드 타다가 그랬다고요? ”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일단 어디가 골절 됐을지 모르니 최대한

안 움직이게 환자를 들것에….. “나는 들것에 실려 구급차를 타고 서산에 있는 응급실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을 해보니 다행히 부상은 뇌진탕과 목에 염좌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뇌진탕이라는 게 몹쓸 증상인 게 누워서 고개만 돌려도 온 우주의 별을 다 만나는 것처럼 별이 보인다. 주변이 빙글빙글 도는 게 보통 어지러운 게 아니다. 목에도 염좌가 심하게 들었기에 보호대를 하고 병원에서 나왔다. 친구들은 근처 모텔을 잡고 침대에 나를 눕힌 후 텐트 철수를 하러 갔다.


  모텔 천장에는 왜인지 거울이 발라져 있었는데 나는 힘없이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눈을 감았다 뜨면 거울에 별이 나타나며 빙글빙글 도는데 그 무늬가 만화경을 보는 것과 같았다. 아, 나는 그저 만화경 속에 갇혀있는 소인이로구나. 어지럼증이 금방 낫지 않아서 며칠 연차를 내고 목에 보호대를 하고 출근했다.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 나이에 급경사에서 보드 타다 뛰어내려서 뇌진탕과 염좌를 얻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워 자전거 타다 넘어졌다고 둘러댔다. 지금생각하면 보드나 자전거나 그게 그거인 듯싶은데 말이다. 자전거는 왠지 어른의 스포츠라고 생각했나 보다. 후유증은 꽤 오래갔으며 낯선 곳에서 다치면 모두가 고생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 후로 한동안 보드를 끊었는데 지금은 무릎관절이 안 좋아서 못 탄다.


오늘의 생활 꿀팁:

1. 경사를 내려오는 보드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

2. 세상은 거대한 만화경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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