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유서를 잘 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과 같은 일상적인 하루가 완전히 변해서 다른 모습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이것저것 벌려 놓은 일을 수습하지 못하고 떠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분리수거를 이주동안 안 했는데, 내 서랍에는 먼지 낀 잡동사니들이 뒹굴고 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강하게 떠올렸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날 날씨는 어땠지? 하늘은 침을 모아 뱉을 준비를 하듯 잔뜩 찌푸렸고 공기는 축축 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입김이 나오는 순간 얼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산 바다 어디였는데, 나는 무릎까지 오는 반질거리는 남색 점퍼를 입고 머리에는 털로 된 모자를 썼다. 남색 점퍼의 모자에는 라쿤털을 모방한 가짜 털이 달려있었다.
나는 황량한 느낌을 주는 바다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1월 말이라 춥기는 추웠다. 그래도 무시무시한 한파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혹시 버스가 전복된다면, 혹시 테러리스트가 이 버스를 납치한다면, 혹시 외계인이 이 버스에 광선빔을 쏜다면 하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무슨 일을 겪든 나는 살아서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이유는 없었다. 이내 나는 뇌내망상 속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어딘가 서럽기는 했다. 딱히 해놓은 것도 없고 나 같은 건 세상이 별로 기억해주지도 않겠지. 평생 일군 과업이라고는 아무튼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다는 것뿐. 우리 부모님 말고 내 죽음을 슬퍼해줄 사람은 있을까, 집에 음식물 쓰레기 처리 안 했는데, 그리고 내가 나눠줄 만한 유산이 있던가?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왔다 갔다 했다.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자꾸만 공책 밖으로 미끄러져나가는 볼펜을 붙잡고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 짧은 여행을 하며 기운을 충전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다. 이십몇 년의 시간 동안 늘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괜찮았던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가족들과 친구에게 사랑을 한 번도 전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후회가 되지만 지금이라도 사랑을 전해본다.
- 나 외의 유일한 생명체였던 초록이(가명, 2개월, 화분)는 엄마에게(끝까지 잘 돌봐주세요)
- 만화책과 책은 모두 동생에게(시리즈 중에 사라진 것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영혼의 양식이 될터)
- 나일론기타는 아빠에게(중고 장터에서 싸게 데리고 온 것이지만 셋업 받으면 쓸만할 거예요)
- 아이팟은 친구 y에게(엄선된 플레이스트니 지겨우면 랜덤으로 돌려 들으면 괜찮을 거야)
- PC는 친구 s에게(비록 똥컴이지만 문서작성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혹시라도 암호 안 걸린 일기 같은 거 발견하면 발견 즉시 삭제할 것, 그냥 버리고 싶다면 하드는 무조건 삭제하고 버릴 것)
나머지 물건들은 쓸만한 건 기부하고 다 버려주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당신들께 평화가 함께 하길.‘
써놓고 보니까 서러움은 싹 사라졌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다달이 받는 쥐꼬리만 한 월급 이외에는 재산이랄 것도 없고 책임져야 할 생명도 없고, 가지고 있는 물건은 허접할 따름이었다. 나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와 정신이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했다. 버스전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테러를 당하지 않았으며, 외계인이 살인광선 같은 걸 쏘지도 않았다. 나는 살아있었다. 나는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며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했던 버스에서의 시간을 싹 잊은 채 터미널에서 파를 송송 썰어 넣은 라면을 해치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타성에 젖은 일상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그 기억이 문득 오늘 떠오른 것이다. 여행이라는 키워드로 뇌를 검색해 보니 태안에서 돌아오던 버스 안이 생각났다. 이처럼 여행은 낯선 감각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허튼 내뇌망상일지라도 인생의 다른 면을 볼 수 있게끔 우리를 인도한다. 이것이 때때로 우리가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때에 비하면 책임져야 할 생명도 있고, 가지고 있는 물건들과 빚도(특히) 많다. 지금 내가 유서를 쓴다면 작은 수첩 한 바닥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기타도 이제 하나가 아니다. 내 기타 세대에 업장에 있는 기타 네 개, 이걸 다 누구한테 떠넘겨야 한단 말인가
여전히 나는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거나 살가운 연락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불의의 사건으로
갑자기 생을 떠나게 될 때 나는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 사랑한다는 말을 아꼈던 것일까, 마구잡이 파일로 가득 찬 집과 노트북일까, 오늘은 그것을 좀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