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뮤하뮤 Jul 16. 2024

치앙마이 바이, 헬로 빠이

  우리는 추운 겨울인 한국에서 여름나라인 태국으로 떠나 조그만 수영장이 딸린 가성비 좋은 호텔에 도착했다.  수영장이 있는 라운지에 배낭을 내려놓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나풀거리는 흰 솜이 달린 빨간 산타모자를 쓴 직원들이 웰컴드링크를 내왔다. 나는 동행한 친구 영지와 함께 놀라워했다. 아, 오늘이 크리스마스구나. 자그마한 수영장의 물은 맑아보였지만 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웰컴드링크로 받은 땡모반(수박주스)을  단숨에 들이켜고 밖으로 나가 식당을 찾았다. 좋아하는 태국음식을 몇 접시 시켜놓고 맥주를 마시며 앞으로 한 달의 일정동안 뭘 할까 의논해 본다. 우리 둘 다 심각한 무계획형 사람들이라 일단 비행기표와 지금 머무는 숙소만 예약해 왔다. 젓가락으로 팟타이면을 건져 후루룩 먹으면서 이번 여행의 키워드를 말해본다.

" 트레킹 어때, 치앙마이 트레킹 좋다던데, 새해를 산속에서 맞는 거지." 내가 말한다.

" 트레킹? 벌레 많을 것 같은데..... 그래, 가자."

" 해수욕! 해수욕도 해야지. 꼬 사무이같은데 가자." 영지가 말한다.

" 당연히 가야지. 가서 스쿠버다이빙할까?"

" 오, 좋아."

" 아, 그리고 빠이는 가야 함, 예전에 빠이에 다녀온 적 있는데 되게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 물론 가려면 교통에 고통이 따르지만." 영지가 말한다.

" 그렇구나, 가자." 나는 맥주를 한잔 더 따르면서 인도여행을 떠올렸다. 아무렴 승차감이 엉덩이가 쪼개질 것 같은 인도의 로컬버스만 할까

우리는 토론 끝에 여정을 치앙마이트레킹-빠이-메홍손-남부 바다 어디-다시 치앙마이-한국으로 잡았다.


  길에 보이는 아무 여행사에 가서 2박 3일 트레킹을 예약했다. 여행사직원이 보여주는 사진에는 동굴도 있고 폭포도 있어서 엄청난 대자연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차오른다. 베테랑 가이드는 물론이고 매끼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가 제공된다고 하니 우리는 몸만 가면 되는 것이다. 코끼리 목욕도 프로그램에 있었다. 강가에 조용히 석양이 내리고 신성한 코끼리들이 목욕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가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우리는 큰 짐은 숙소에 맡겨두고 트래킹 짐을 최대한 가볍게 꾸려 썽태우(태국의 교통수단 중 하나)를 타고 온 직원을 따라나섰다. 다른 숙소 여러 군데를 도니 각양각색의 여행자들로 썽태우가 가득 찼다. 동양여자 둘(우리), 동양남자 하나, 이스라엘 여자, 프랑스 커플, 독일남자, 미국인 두세 명이 좁은 썽태우에 모여 앉아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프랑스커플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종일관 인상을 쓰고 있다.


  산 입구에 도착했다. 우리의 가이드는 체크 남방을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심지어는 등에 멘 배낭조차 없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와 등산스틱, 아웃도어 모자등으로 무장한 우리 무리와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다. 우리 다국적 트레커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글을 탐험하는 최초의 탐험가 같은 결연한 표정으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디뎠다. 젊고 혈기왕성한 원숭이처럼 입과 몸을 재게 놀리던 미국과 독일남자들은 2시간이 지나자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눈앞에 날파리가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아까는 열대의 숲이 그저 이국적이고 아름다워만 보였는데 풍경 볼 겨를이 없다. 미지근한 바람조차 불지 않고 땀으로 번들번들해진 몸, 바닥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사이로 시무룩한 얼굴들이 보인다. 프랑스커플은 변함없는 불만 있는 표정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긴다.


  더워서 딱 죽겠다 싶을 때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땅만 보던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폭포가 나왔다. 사진에서 본 폭포보다 5배는 작았지만 어쨌든 물이다. 사람들은 훌렁훌렁 옷을 벗고 폭포 아래의 작은 웅덩이에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10분 후 기름종이와 고무줄로 포장한 도시락과 물을 가지고 왔다. 계란과 두부 팟타이였다. 면은 라면이었다. 기름종이에 싼 라면팟타이가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는데 막상 먹어보니 손맛이 느껴지는 맛이라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잠시나마 활기를 찾은 그룹은 기력을 회복한 원숭이처럼 열대우림을 누볐다.


  땅거미가 내릴 때쯤 고산족 마을에 도착했다. 침실은 대나무로 만든 넓은 공간에 요가 주르륵 깔려있고 자기의 모기장으로 들어가서 자는 시스템이다. 나는 만족했다. 배낭에서 사과를 꺼내 와그작거리며 요 위에서 뒹굴다가 저녁밥이 됐다는 소리에 뛰쳐나갔다. 메뉴는 카레와 닭고기였는데 닭고기는 별로 관심 없으므로 패스. 야영에는 카레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불만 없이 먹었다. 밤 9시가 되자 가이드는 우리를 대청마루로 불러앉혔다. 잠시 어수선하더니 고산족 아이들이 전통의상을 대충 꿰어 입고 눈을 비비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면서 박수를 쳤다. 아이들의 깜짝쇼는 귀여웠지만 팁박스가 나와 돌아다닐 때 여행자들은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소 짠 팁을 넣었다. 프랑스커플의 표정은 더욱 불만 있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가이드는 캠프파이어를 준비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2시간 후면 2013년 새해가 밝아온다. 가로등도 없고 조명이라고는 군데군데 켜 놓은 초밖에 없어서 하늘의 별이 제 존재를 드러낸다. 말이 없는 여행자들만 모였는지 몇 마디 대화가 오가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어쿠스틱기타를 가지고 왔다. 나는 기타를 받아 튜닝을 했다. 사람들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저 동양에서 온 여자는 어떤 신비한 음악을 연주할까. 튜너기가 없어 대충 튜닝을 마친 나는 이거 칠 사람? 하며 넘겼다.

"너 기타 안쳐?"

"나는 튜닝 담당이야."

(그때는 왕초보라 칠만한 곡도 없었고 대충 기타를 잡을 줄 아는 지금도 클럽에서 연주는 해도 솔로 기타를 치라하면 별로 레퍼토리가 생각이 안 난다. ) 누군가 포크송을 몇 곡 연주했다. 초를 바라보며 저물어가는 이번해와 작별인사를 했다. 타닥타닥 모닥불이 잘 타들어가는 소리가 난다. 나는 튀어 오르는 불씨를 피하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거 알아? 숯의 빨간 부분을 보면 원적외선이 나와서 눈에 좋대."

"오, 많이 봐야지."(과학적으로 검증된 건지는 모르겠다)


  자정이 되자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해피뉴이어라고 외치며 새해를 축하했다. 곧 모기장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시끄럽게 우는 닭소리에 일어나 잠시 산책을 했다. 근처 공터로 나가니 닭들이 돌아다니고 아래로는 산 밑 마을이 보였다. 허름한 건물이 있길래 탐색을 해봤더니 학교로 쓰이는 건물인 것 같았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 바나나 잎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도로에 인접한 부분이 나왔다. 우리를 데리러 썽태우가 와있다. 프랑스커플은 더욱더 찌푸린 인상으로 가이드에게 뭐라고 항의를 한다. 알고 보니 이어질 활동은 코끼리 타기였다. 코끼리 목욕이 아니라 코끼리를 타고 물을 건너는 트레킹 코스라고 한다. 가이드가 오늘 코끼리 목욕을 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는 했는데, 내 생각에는 원래 코끼리 목욕은 코끼리 트레킹을 좀 더 윤리적으로 보이게끔 포장한 표현일 뿐인 것 같았다.


  프랑스여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생각 없이 코끼리 트레킹을 하겠다고 썽태우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혐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친구를 배려하느라 한번 해보라고 말했고 친구는 조금 망설이다가 오케이 했다. 알고 보니 영지는 내 기분을 맞추느라 마지못해 코끼리트레킹을 했다고 했다.(지금이라면 둘 다 망설이지 않고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뭐, 그때는 그랬다.) 코끼리의 단단하고 낯선 피부에 얹어져 있는 안장을 밟고 올라탔다. 여행자들 앞에는 작은 체구의 남자들이 사탕수수와 뭉툭한 갈고리를 들고 앉아있다. 갈고리를 보자 죄책감이 몰려온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코끼리 등위에 앉아 뱃속에 나비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코끼리는 흙탕물과 진흙길을 묵묵히 걸었다. 코끼리 떼들은 흐르는 강의 위쪽으로 데려다주었다. 친구의 안색을 살피니 좋지 않다. 나보다 더 진한 죄책감을 맛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코끼리는 지능이 높고 집단의 고유한 언어가 있으며 가뭄에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갈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동물이다. 이런 존재를 사람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 위해 새끼 코끼리를 가두고 꼬챙이로 찌르며 학대한다. 학대에 살아남은 코끼리는 정신적, 신체적인 외상을 견디며 관광객들을 태워야 한다. 씁쓸한 기분을 애써 추스르며 다음 활동에 참여한다. 관광객들을 위한 다음 코스는 통나무로 된 뗏목을 타고 상류에서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헬멧과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뗏목에 올라탔다. 급류를 타는 것은 스릴 있었으니 은근히 몸이 다 젖었다. 또다시 뱃속에 나비가 요동친다. 날씨가 더운데도 몸이 젖은 채로 오래 있으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 영지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있었다. 뗏목 투어가 끝나고 보트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트레킹을 마무리하고 짐을 맡긴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 뱃속은 복잡했다. 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하는 고산족 마을 아이들, 학교는 공터에 세워진 허름한 건축물이며, 맨발에 슬리퍼만 신은 가이드, 사탕수수를 받아먹으며 관광객을 태우고 걷는 코끼리가 차례로 눈앞에 떠올랐다. 왜 모르는 척 관광상품을 소비하며 동물 학대에 일조하였는가, 왜 나는 불편한 걸 말하며 유난 떠는 진상 관광객이 되지 못했나 자책도 했다. 숙소로 돌아와 밥집에서 우리는 용암같이 시뻘건 똠양꿍을 숟가락으로 퍼 먹으며 같이 후회하고 빠이에 가서는 즐겁게 보내보자고 희망찬 다짐을 했다. 우리는 곧 빠이로 간다. 여행자들의 무덤이라는 별명을 가진 곳 빠이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