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4년 냉파 프로젝트에 선택받은 냉동인간
2015년 발리에 가기 전 쿠알라룸푸르에 들러서 짧은 관광을 하기로 했다.
비행기에 타면 승무원은 내게 묻는다.
비프 오어 치킨?
그러면 나는 눈을 굴리며 덜 싫은 걸 선택한다.
그 질문을 받지 않도록 미리 채식메뉴를 신청해 봤다.
뭐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점심으로는 두꺼운 면을 고추기름소스에 볶은 것, 양배추, 콩단백 고기, 아스파라거스, 버섯을 함께 버무렸다. 샐러드에는 와인식초드레싱, 후식으로는 과일 두 조각이 나왔다. 다른 이들의 후식은 뭘까 봤더니 케이크가 나왔다. 부럽다.
좁은 공간을 인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영화를 한편 보니 간식시간이다. 남들은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초코바를 받았다. 나는 해초, 토마토 한 조각, 콩단백고기 세 조각, 콩나물과 버섯무침이 들어있는 유부주머니를 받았다. 해초가 질겨서 턱이 아팠다. 인공적인 달콤함이 그리워서 초코바를 쳐다봤다.
혹시 엑스트라 있습니까? 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없습니다. 짤 없이 돌아오는 목소리
공항에 도착해서 300링깃을 기계에서 뽑았다. 화폐단위가 링깃이라니 발음이 귀엽다. 시내로 나가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니기로 한다. 시금치를 으깨 만든 라자냐하나를 사고 카페에서 아이스초코를 마셨다.
부킷빈탕에 모노레일을 타고 놀러 가려고 한다. 차이나타운이 즐비한 곳이다. 노상에 테이블이 나와있고 향신료 냄새가 공기에 가득하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태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똠양꿍과 팟타이와 타이거맥주 한 병을 시켰다. 후텁지근한 날씨가 팔뚝과 다리에 척척 감겨온다. 심심하다. 멍하니 입을 놀리면서 사람들을 쳐다봤다. 타이거 맥주가 많이 시원하지는 않다. 배도 부르고 몸이 축축 늘어진다. 쌍둥이빌딩을 보러 가려고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모노레일을 타고 다시 센트럴역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난다. 대중교통에 지독하고 향기로운 향이 무겁게 가라앉아있다. 나는 비록 땀냄새와 맥주 냄새가 나지만 이 두터운 향에 가려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센트럴역으로 와서 공항 가는 익스프레스를 탔다. 나는 예약해 둔 캡슐호텔에 왔다.
왜 하필 캡슐 호텔을 예약했냐면 어차피 6시간만 자고 나갈 것이고 캡슐호텔이라는 걸 경험해보고 싶었다. 6시간의 가격은 80링깃, 보증금 50을 냈더니 수건을 줬다.
방은 말 그대로 상자 한 칸이고 샤워실은 공용이다. 나는 밀폐되고 좁은 공간을 싫어한다. 관 같은 느낌이 아닐까 걱정했으나 생각보다 아늑하고 합리적인 공간이었다. 약간 영화 <제5 원소>나 <에어리언 커버넌트>에 나오는 의료캡슐이 떠오른달까. 아니면 드넓은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선에 있는 승무원들을 위한 방 같기도 하다.
나는 온몸의 땀구멍 사이에 찌든 먼지와 피지를 샤워실에서 깨끗하게 씻어내고 내 캡슐로 돌아왔다. 어느덧 나는 이 캡슐에 정이 들었다. 오늘 새벽 다섯 시 반에 체크아웃하는 것이 살짝 아쉽기까지 했다. 자판기에서 시원한 탄산음료 하나를 뽑고 아까 사둔 시금치 라자냐를 라운지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칼로리가 높을 것 같고 느끼하면서 시금치와 다양한 야채들이 풍부하게 들어있어서 맛이 있었다. 양치를 하고 캡슐로 들어갔다.
지금 지구는 원시화되고 있다. 인간의 탐욕이 부른 재양,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져서 대부분의 도시가 물에 잠겼다. 지속적인 산불로 많은 생명이 목숨과 살 곳을 잃었다. 바다는 산성화 되고 인류는 멸종위기에 처했다. 나는 냉동인간이 되어 지구에 인류의 문명이 다시 번성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이 버튼을 누르면 나는 잠에 빠질 것이고 A.I가 잠든 내 육체를 책임지고 돌봐줄 것이다.
덜컥, 저벅저벅, 쉬, 쏴아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소리에 망상에 집중할 수가 없다. 잠도 달아난다. 나도 오줌을 누러 캡슐밖으로 빠져나간다. 손을 씻고 쪼리를 끌며 돌아와서 아까 하던 망상의 다음이야기에 집중하려 노력한다.
나는 나의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버튼을 누른다. 왜 하필이면 많은 사람 중에 나 따위가 ‘냉동인간 파워 프로젝트(이하 냉파, 냉장고 파먹기가 아니다.)‘에 선정되었는가.
수많은 인간적인 고뇌와 지구에서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삐로로롱- 또로로롱-
알람소리다.
앗. 벌써 지구에 인류의 문명이 번성하였는가, 설마 동굴에 벽화 그리는 시대는 아니겠지. 적어도 스마트폰은 있어야 하는데
(아 이 버전이 아닌가)
잠깐만 여긴 쿠알라룸푸르 kilia2구역의 캡슐 호텔.
나는 지구행이 아니라 발리로 가는 국제공항으로 가는 여행자다.
흐트러 놓았던 짐을 챙기고 셔틀을 타러 갔다. 셔틀도 어쩐지 우주스럽다.
C 게이트 쪽으로 넘어갔다. 냉동인간이 되기 전 마지막 만찬을 먹도록 하자.
어, 스타벅스다.
나는 냉동인간처럼 뻣뻣한 몸을 잽싸게 놀려 따뜻한 블랙커피와 바닐라레몬머핀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