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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Jun 25. 2024

잊지 않을게요 남열

방수천 덮고 태풍은 무리무리

  나에게는 텐트가 하나 있다. 텐트라고 하기도 부끄럽다. 손바닥만 한 방충망과 입구에 자크가 달려있는 방수천이라고 말하는 게 더 낫겠다. 어떤 장르든 처음에 장비를 살 때는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친구들과 백패킹을 시작할 때 무슨 텐트를 살까 고민하던 중 내 최우선 고려대상은 무게로 정했다. 텐트, 랜턴, 침낭, 매트, 취사도구, 갈아입을 옷, 식량, 식수,  행동식 최대한 필요한 것으로만 배낭을 꾸려도 허리가 휘청 휜다.

텐트를 세울 폴대를 아무리 경량으로 맞춰도 없는 것이 가장 나을터, 서칭을 하다가 캠핑 커뮤니티에서 경량 텐트를 공구하는 것을 봤다. 일단 텐트의 네 모서리는 경량핀으로 고정한다. 입구 쪽의 지붕에 작은 주머니에 등산스틱을 끼워 넣어서 땅에 비스듬하게 세우면 완성이다. 천 자체의 무게는 500그램도 채 안되므로 얇은 방수천하나와 같이 주머니에 넣어서 배낭에 넣으면 상당히 가볍다. 등산스틱은 어차피 가져가야 하는 것이니 정말 좋지 않은가. 색깔도 연두색에 가까운 카키색, 심실링처리도 대충 되어 있어서 비도 제법 막아줬다. 나는 이 텐트(aka. 덮고 자는 방수천)를 가지고 여기저기 잘도 다녔다.


  어느 날 서핑커뮤니티에서 전라남도 고흥에 가면 남열이라는 해수욕장이 있는데 엄청나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꿀파도를 탈 수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남열이라는 단어는 내 마음에 콕 박혀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남열이라는 곳을 어떻게 가야 하나 검색했다. 전라남도는 대중교통으로 여행하기에 인프라가 좋지는 않다. 나는 고흥으로 가는 버스를 몇 시간씩 타고 해가 질 무렵 도착했다. 거기에서 남열해수욕장 쪽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장에서 이것저것 사온 꾸러미를 곁에 둔 할머니들 몇 분이 자식, 손자, 건강을 주제로 천천히 담소를 나눈다. 창밖으로 보이는 움직이는 풍경이 어둑어둑하다. 정류장도 많고 정차도 많이 하는 버스가 남열 해수욕장 근처에 섰다.


  가로등이 하나밖에 없는 거리가 그저 검다. 저녁 8시 정도밖에 안 됐는데 사위가 어둡다. 정류장 근처에 슈퍼가 하나 있다. 인적도 드문데 저쪽에서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를테면 "순애야-" 잠깐의 시간을 두고 다시 이어지는 "순애야-"라는 소리가 일정한 높낮이로 들려오는 거다. 사방이 분간이 안 되는 검은 배경에서 소리만 들려오니 남열귀신인가? 귀신을 만나면 소금을 뿌리는 거였나? 마늘이었나? 잠깐 귀신은 밤 12시 지나야 나오는 거 아니었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으니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어둠 속에서 사람발이 쑥 나온다.

아 깜짝이야, 사람이네(?), 목소리의 주인공은 손에 냄비를 들고 슈퍼 앞으로 왔다. 순애라고 불린 선생님은 그 사람을 맞아 슈퍼 앞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나는 지금이 기회임을 직감했다.  지도앱을 켜도 방향을 못 잡고 나침판만 빙글빙글 돌뿐, 도무지 길을 못 찾겠다.

"안녕하세요? 제가 남열해수욕장에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니, 이 시간에 해수욕장엘 가요?" 순애선생님은 의심스럽게 내 얼굴과 배낭을 훑어본다.

"네, 지도를 보면 이렇게 가는 것 같은데 좀 이상해서요."

"저-기 가로등 보이죠? 거기 지나서 왼쪽으로 꺾어서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오면 금방이에요."

어두운 언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신다. 나는 헤드랜턴을 이마에 장착하고 핸드폰의 플래시도 켰다.

  음, 나는 왜 또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가, 집에서 감자칩 먹으면서 영화나 볼일이지, 뭐 한다고 이 어둠 속을 뚫고 해수욕장에 가며 무엇보다 잠잘 곳은 있으려나? 아 뭐 있겠지. 일단 출발하면 어떻게든 되는 게 여행이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언덕을 올랐다 내려가니 저 멀리 솔밭과 led 조명이 보인다. 오 이곳인가! 나는 반가워하며 바람에 실려오는 바다냄새를 킁킁대며 맡는다. 해변 근처 솔밭에 캠핑시설이 괜찮게 잘 되어있다. 커다란 평상과 지지대에 돛같은 재질의 천으로 단단하게 묶어 고정시켜 놓은 몽골텐트도 있다. 개수대나 화장실도 있다. 나는 떨어진 솔잎이 바닥에 깔려 아늑해 보이는 땅에 방수천을 깔고 텐트를 설치했다. 몇 안 되는 캠퍼들이 강아지와 산책을 마치고 캠핑사이트로 돌아오거나 저녁 먹은 냄비를 씻어 돌아온다. 나도 저녁으로 라면을 하나 끓어먹고 잠을 청했다. 피곤했는지 매트 밑으로 내 몸이 쑥 꺼져 내려가는 것 같다.


  새소리가 짹짹 후르르르 시끄럽기도 하다. 누워서 텐트 자크를 열고 밖을 봤다. 아침이다. 세워놓은 등산스틱이 땅으로 넘어져있다. 덕분에 간신히 유지하던 텐트모양 대신 방수천을 밤새 덮고 잔 것이다. 텐트 밖으로 기어 나와 일단 선크림을 듬뿍 바른다. 피부는 소중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해보려고 했다. 어제는 아늑하다고 생각했던 잠자리가 오늘 보니 다른 사람의 방갈로 앞인 것 같기도 하고 수돗가로 가는 길목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엉뚱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벌써 더워지고 있으므로 매트만 빼내어 그늘밑에 자리 잡았다. 아직 일어날 생각은 없으므로 선글라스만 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달게 자고 있는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오후에 풍랑주의보 내린다던데?"

"그러니까, 태풍온다잖어?"

엥? 풍랑주의보? 태풍?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지금 하늘은 맑은데? 무슨 태풍이 오고 풍랑주의보가 내린담. 그리고 물놀이하러 왔는데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부스스하게 일어나 앉아있으니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나를 쳐다본다. 둘 다 반바지, 반팔에 팔토시를 끼고 있다. 한 명은 모래에서 탈 수 있는 바퀴가 세 개인 오토바이 같은 걸 타고 있다.

"어제 들어오셨어요?" "네"

"캠핑 사이트 이용비 만원 주시면 됩니다." 그는 내 허접한 텐트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그나저나 진짜 태풍 와요?"

"아이고, 날씨예보 안 보고 오셨어요? 오늘 오후부터 폭우에 풍랑주의보 내린답니다."

"헉, 저 여기 서핑스폿 좋다고 해서 온 건데."

"아, 서핑하러 오셨어요? 오늘내일은 아마 무리일 겁니다." 바퀴 세 개 오토바이를 탄 남자가 말한다.

서핑도 문제지만 태풍이 온다면 내 텐트로는 못 견딜 것 같다.

"저 몽골텐트는 얼만가요? 비 많이 오면 비어있는 곳에 들어갔다가 후불로 계산해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무슨 태풍이 온다는 걸까? 나는 의아해하며 산책을 나섰다. 파도를 보니 파도가 엄청나게 높고 지저분한 것이 서핑하기는 틀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호젓한 해변을 지나 솔숲을 걷다 보니 계단이 나온다. 저 멀리 이상한 전망대 같은 것이 보인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따라 올랐다. 고흥우주발사전망대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나는 뭔가 신이 나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고흥우주발사전망대는 나로우주센터와 해상으로 17km 직선거리에 위치해 있어 로켓발사 광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적혀있다. 가장 인기가 높은 장소는 7층으로 360도로 회전하는 전망카페에서 다도해의 환상적인 뷰를 경험할 수 있단다. 1층 안내데스크를 지나 2층 우주도서관에 가니 우주개 '라이카'가 참을성 있는 표정으로 앉아있다. 우주로 보내진 최초의 생명체, 라이카. 라이카를 생각하니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감과 슬픔이 가슴에 가득 찬다. 괴로운 마음을 안고 회전하는 전망대에 가서 유자청에이드를 주문했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짙푸른 바다를 바라봤다. 해변과 논밭,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땅 위에 사는 인간은 하늘을 탐내고 하늘을 넘어서 우주를 정복하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논밭에 농작물을 가꾸며 살고 싶지만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을 타보고 싶다. 우주선에 개를 태워 보내는 것은 싫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누리고 싶고 sf 소설은 재미있다. 고흥유자로 만든 유자차는 달큼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있다. 풍경을 보는 것이 지겨워질 때쯤 왔던 계단을 거꾸로 내려가 해변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이제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근처에는 식당 같은 것이 안 보인다. 어찌어찌 검은 차양을 드리운 간이식당을 찾아서 흰색 플라스틱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나는 해물파전을 하나 시켜서 혼자 다 먹었다. 해안가 모래사장에는 분홍색 갯메꽃이 활짝 피어있다.


  캠프사이트로 돌아가 매트에 앉아 있자니 바람이 점차 거세지는 것을 느낀다. 빗방울도 하나둘씩 떨어진다. 나는 급하게 철수를 하고 배낭을 꾸려 비어있는 몽골텐트로 들어갔다. 내 작은 텐트에 비하면 이 몽골텐트는 궁궐과 같다. 일어서서 돌아다닐 수도 있다. 배낭의 물건을 꺼내어 늘어놓고 랜턴도 켜놨다. 그날밤은 밤새 비가 왔다. 그냥 비가 오는 정도가 아니고 몽골텐트의 천막이 펄럭댄다. 엄청나게 크게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사람통곡소리 같기도 하고 짐승이 표효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바다 근처에서 느끼는 태풍의 영향은 대단했다. 거센 바람에 텐트 안으로 날아들어오는 모래와 솔잎을 맞으며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침낭 안으로 들어가도 전혀 아늑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책도 없고 핸드폰 배터리도 없다. 잠을 자지 못하면 이 밤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려운 과업이 되겠다.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잦아든다. 나는 머리카락과 몸에 뭍은 모래를 털어내려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하루를 더 캠핑하며 보내고 그다음 날에는 바다의 여건이 허락하여 집에 가기 전 서핑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몇 개 안 되는 서핑샵 중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갔다. 컨테이너 몇 개와 바다를 향해 오픈된 부엌 앞에는 빈백이 여러 개 놓여있다. 이쪽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또 다르다. 보드를 빌리려고 하니 지난번에 봤던 바퀴 세 개 오토바이 사람이 있었다. 아, 서핑샵 주인장이시구나. 그는 서울에서 남열로 오게 된 기나긴 대중교통 여정을 듣더니 가장 좋은 건 순천에서 ktx 타고 서울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마침 순천에서 온 서퍼들이 이따 순천으로 돌아간다니 카풀을 하란다. 나는 옳다구나 하고 맘 놓고 서핑을 했다. 파도는 우연히 한 개 잡았을 뿐, 그저 바다 위에 떠서 둥실거렸다. 방수시계를 차고 왔는데 시계가 망가졌는지 숫자가 잘 안 보인다. 최대한 빨리 나온다고 나왔는데 방금 전 순천 서퍼들이 시내로 출발했단다. 몇 시까지 버스정류장으로 오면 나를 순천으로 태워줄 수 있다는 전갈을 남겼다고 한다. 여기서 버스정류장은 어떻게 가야 할까, 콜택시를 부르는 게 제일 낫겠다 싶어 콜택시를 찾고 있던 중 서핑샵 사장님이 삼륜구동 오토바이를 끌고 왔다.  요 앞 버스정류장까지 태워주신다고 하셔서 한 번만 사양하고 냉큼 탔다. 대충 수돗물로 헹군 바닷물이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진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삼발이 오토바이가 생각보다 빨라서 속도감이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하와이안 셔츠가 바람에 하늘거린다. 덕분에 무사히 순천서퍼들을 만나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로 남열에 한 번이라도 더 가보고 싶었는데 시간과 거리의 제약으로 계속 마음만 먹고 있다.


잊지 않을게요. 남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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