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글쓰기 35] 24.11.12. 고명환 고전이답했다 걷기
가을은 떠나지 않았다.
입동(立冬) 지난 지 일주일째,
가을은 아직 곁에 있다.
옆집 처마에도, 산책길 은행나무에도 걸려있다.
깊은 가을 풍경 속을 다리가 후들거리게 걸었다.
고명환 작가 덕에 오랜만에 땀나게 걸었다.
<고전이 답했다>를 띄엄띄엄 읽는 중이다.
고등학교 때 일주일에 한 번 있었던 미술 수업처럼.
꽤 멋진 말이 있었다.
소제목이 ‘일단 시작한 후에 계획하라’였다.
여기서도 고전 한 구절을 인용했다.
안셀름 그륀 신부의 에세이 <머물지 말고 흘러라>다.
“결심이라는 구실로 양심의 가책을 줄일 수는 없습니다.
결심은 때때로 현재의 도전을 피해 전혀 구속력이 없는
미래로 도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고명환은 이렇게 풀이했다.
“결심 금지.
내일부터 책을 읽겠다고 다짐하는 건
내일로 도망간 것이다.
인간은 지금 하고 싶지 않아서 결심을 한다.
미루고 싶을 때 결심을 하는 것이다.
해야 할 결심은 한 가지 뿐이다.
지금부터 절대 결심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면,
결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냥 하라.
지금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
얼마든지 있다.
그것을 시작하고 계획을 세우라.
‘문득’이 튀어나올 때까지 꾸준히 밀고 나가라.”
위에 통증이 발병한 지, 11일째다.
만사가 귀찮고, 기력이 떨어지고,
걷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잡생각만 늘어나고 몸은 축 처져갔다.
이래선 안 되느니, 내일은 꼭 일만 보를 채우리라고
꿈만 많은 얕은 잠에서 뒤척일 때마다 결심을 하곤 했다.
마음뿐 내일은 또 내일이 되었다.
책을 덮고 문을 열었다.
공기는 상쾌하고 부드러웠다.
분필로 칠한 듯한 구름이 하늘에 붙어 있었다.
푸른길로 가려고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당 너른 집 평상에 할머니 몇 분이 감을 깍고 있었다.
한 분은 사다리 타고 올라 처마에 매달았고.
한동안 서성였다.
도심 한복판에서 보는 풍경이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광주 푸른길은 옛 경전선 철길 공원이다.
학생들 등하굣길로,
인근 병원 환자들 산책길로,
걷거나 뛰는 운동길로,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발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걷고 걸었다.
나무들이 울긋불긋했다.
발밑에선 마른 낙엽이 서걱거렸다.
노점이 들어섰다.
감, 바나나, 사과, 가지, 호박, 무, 배추, ... .
붕어빵 내음이 나고, 호떡집 앞에 줄이 길다.
이어폰에서는 케이비에스 클래식 에프엠 (KBS Classic FM)이 흘렀다.
결심은 필요 없었다.
모처럼 상쾌했다.
사람은 자고로 몸을 움직여야 혀.
고맙다, 고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