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내 이름은 맹 순자) >>
내 이름은 맹 순자
이 재선
나는 개인적으로 옛글을 좋아한다.
장편 소설이나 전문 서적과 같은 깊이 있고 시간상 능력상 제약을 받는 것은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지만 소소한 글들은 현재의 내 삶의 유일한 위안거리라 말할 수 있지 싶다. 주로 밤을 이용한 나의 주경야독은 어릴 적 입시, 취업 공부와는 형태가 조금은 다른 나만의 마음 수련법이라 할 것이다.
현재의 내 삶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불가결의 덕목일 것이다
나란 존재는 누구인가? 내 성격이 정말 이런 것이었나? 반문할 때가 부지기수였다.
기존의 나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선함을 받고 나왔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따랐다면 현재의 나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에 가까운 가끔은 나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내면의 광기(狂氣)를 표할 때가 비일비재했다. 왜냐하면 나는 회사라는 한 공동체에 속한 몸이라 업무추진을 위해서는 눈에선 불같이 타오르는 레이저가 입에서는 록 가수의 샤우팅 보다 큰 고함을 지를 상황이 거의 매일 치러지는 일련의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20대 후반에서 불과 얼마 전 40대 중후반의 업무는 스트레스는 받지만 한국의 본사 업무만 충실하면 될 일이었다. 그때도 나는 맹자의 성선(性善)에 무게를 둔 사람이었다 하지만 5년 전부터의 베트남 현지 생산기지 상황은 글 한 귀 말 한마디에 따라 수 천 혹은 수 만족의 제품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신경을 바짝 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현재는 성악의 본성을 따른 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지 싶다. 일반적인 삶은 그렇지 않다고 나 자신도 생각하고 있지만 현실의 난 상반된 행동을 한두 번이 아닌 무한 반복의 길을 걷는 것이 항상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사람의 본성은 성선(性善)도 아니요 성악( 性惡)도 아니요 단지 환경에 따라 바뀌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이 아닌가 생각된다. 처해진 환경에 따라 맹자도 될 수 있고 순자도 될 수 있는 그런 것이 몸으로 느낀 나의 삶이지 싶다. 현지인 관리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 싶다. 물론 내가 직접 제품을 만드는 공원(工員)은 아니지만 배의 항로를 쥐고 있는 선장의 입장에서 느끼는 막중함은 상상을 초월할 중압감이 엄습하는 것은 사실이다. 잘못된 방향타(方向舵) 하나는 바로 좌초의 길로 접어들기 때문이지 싶다. 맹자는 잠시 숨겨 두더라도 순자를 꺼내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때가 많다 생각된다.
인간사 똑같은 상황이지 싶다. 늦게 출근해 빨리 퇴근하는... 그러나 그것은 나름의 시스템이 갖춰진 하이테크(high tech) 산업에선 가능할 일이겠지만 현재 내가 관리하는 노동 집약적인 산업인 경우 그러한 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리라....
일찍 퇴근하려다 영원히 퇴근할 오류를 막기 위해 오늘도 순자의 눈과 입으로 살아가는 나...
현재의 나는 싫지만 책임의 무게를 거뜬히 들 수 있는 체력을 키우는 중이라 할 것이다.
아침 미팅 시간의 사무실에선 맹자, 순자가 겹치는 상황이 연출이 된다. 적절한 당근과 채찍은 일의 효율을 높이는 하나의 방법이지 싶다. 철저히 사무적으로 변하는 나를 한탄해 보지만.. 나는 한 집안의 아버지이며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목표와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현실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의 영속성(永續性)은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질 내면의 순자와 굿바이 할 그날을 위해 오늘도 나는 할 일을 할 뿐이다.
감춰놓은 맹자의 성선(性善)이 나타날 그날을 위해....
그래서 나는 JASON이 아닌... 내 이름은 맹 순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