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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침반(판)

10년의 기다림

by Another time 자축인묘

나침반(판) ( 10년의 기다림 )



오늘도 포물선을 그리며 삶을 살아간다. 그동안 삶을 반추해 본다




2017년 첫해 1년은 이전의 삶을 후회하며 살았다

조금만 더 건강을 생각했더라면








2018년 2년이 지나며 무뎌진 삶을 살았다

최소한의 생활비만 벌 던 때였다. 형님의 배려로 전통주를 배우게 되었다.







2019년 3년이 되며 아이들이 예민한 사춘기를 넘기는 시기가 오며 점점 더 성장해 갔다

다른 집과 비교가 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제는 경제적으로 가장의 역할에 더 충실해야 된다는 절실함이 들었고 마침 해외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스트레스로 인해 나왔던 회사를 가장의 책임을 위해 또다시 그 일을 접하게 되었다.






2020년 4년 차에는 코로나 시작으로 전 세계가 시끄러웠다

모든 사람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장 밖으로 발을 뗄 수도 없던 시기였다


2021년 5년 차 역시 코로나의 위세가 심상치 않은 때였다. 어디를 가도 코로나 검문이 있었고 백신이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1차 2차 백신 접종을 베트남에서 가졌다 한 번은 한인회에서 한 번은 공장에서. 정말 길고 길었던 코로나와의 싸움이었다. 공원들은 F1, F2로 분류되어 공장에서 텐트를 치며 생활했던 시간도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 봐왔던 수용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코로나 양성반응을 일으킨 사람은 분리되어 격리가 되었다. 이런 코로나 시국에도 공장은 쉴 틈 없이 돌아갔다. 본사에서는 각 바이어들마다 직접 공장방문이 허락되지 않아 온라인, 유선상으로만 업무 연락이 가능했던 시기였다.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쉴 틈 없이 제품이 내려갔던 시기이기도 했었다. 이때 큰아이가 공무원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 3학년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2~3년 동안 강원도에서 요양 아닌 요양 생활 하는 것을 봐와서 그런지 일찍 사회로 발을 들여놓았다... 항상 큰 아이에게는 빚을 진 기분이 든다. 이때부터 나는 새로운 계획을 잡는다. 큰 아이에게 뭔가는 남겨주고 갈 것이라는 일종의 오기가 발동되었다. 작은 아이까지 공부 마쳐주고 나면 그다음은 애 엄마와 큰아이에게 뭔가는 남겨주고 갈 것이라 마음을 가졌다.


2022년 6년 차 여전히 코로나 상황은 지속되었고 서서히 국가 간의 봉쇄가 풀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 본사와 세계 각국의 바이어들이 공장을 찾기 시작했다. 코로나시기를 겪으며 마냥 코로나 시기가 나쁘기만 할 것이라 추측한 내 생각에 장단점을 파악하는 아이러니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때 작은아이가 해외로 대학이 됐다 연락이 왔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든다는 것도 알았다... 졸업할 때까지는 걱정하지 말고 다니라 안심시켜 주었다. 작은 아이도 아버지의 이전 요양 생활을 알아서 그랬는지 기뻐하며 이야기해야 할 대학 합격의 순간을 조심스럽게 알려왔다.


2023년 7년 차 메인 바이어의 오다가 최 정점을 찍는 해였다. 상반기와 하반기를 통틀어 최대 실적을 낸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만물의 이치는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이 말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싶다. 그 해 12월부터 다음 해 상반기 오더가 불투명 해지기 시작했다. 천여 명의 공장 공원들과 몇 명의 한국 상주인원의 일자리에 균열이 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2024년 8년 차 아이들은 각자의 틀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보다 오다 상황과 판단을 해야 되는 위치에 있으므로 밤잠이 오지 않을 때가 여러 날 있었다. 회사가 살아야 명맥이라도 유지할 것이므로 본사 사장님의 결정 사항을 따라야 했다. 일부 인원을 감원하는데 앞장을 서야만 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던 부장님들을 보내야만 했다 직책은 나보다는 아래이지만 일적인 것 이외의 것들은 8~9년은 더 풍랑을 겪으셨으므로 어른으로 모셨다. 5~6년을 같이 동고동락한 동료를 떠나보내기는 쉽지가 않았다. 이때부터 사회의 냉정함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표는 20~30대의 몸은 될 수 없지만 20~30대의 몸무게를 유지하며 근육의 양을 늘리게 되었다 6개월이 지나 몸무게는 10KG가 빠졌고

온몸이 근육질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 어느 때 사회의 냉정함을 본인 스스로 받을 수 있으므로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몸을 만들기로 한 결정은 잘했다 생각된다.

언제 어디에서 출격 대기가 끝나있는 스텔스 전투기처럼 항상 5분 대기조 상태로 오늘도 하루를 보내고 있다.


2025년 9년 차 앞으로 다가올 9년 차 아마도 이때가 한국 복귀의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제는 아이들 공부는 거의 마무리 상태일 것이고 나는 한국에서 이 일이 아니더라도 경제적인 뭔가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2026년 아이들이 모두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적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집사람과 약속한 그동안 아이들 키우며 살았던 20년이 넘은 아파트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 준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것이리라... 2025년 9년 만에 다시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왔을 때는 서먹하고 했겠지만 한 해가 지나고 나서는 이전 젊을 시절 이상으로 평온함을 찾을 것이라 생각된다. 짬짬이 가끔씩 들려오는 시낭송 대회나 수기 및 소설 공모 그리고 우리 술 전통주 대회에도 지원하고 출전하는 기회들이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기도 한다......



위와 같이 10년의 기다림으로 내 인생의 나침반을 잡고 먼바다를 항해할 것입니다.

10년이 지나면 또 다른 나침반이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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