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히고 삭히고 삭히다 보면....
오늘은 이전 코로나가 시작되는 2019년 시절 정리 해 두었던 수필과 시와 시낭송을 같이 올려봅니다.
홍어
희뿌연 회색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현장 사무실로 출근한다.
기숙사가 공장과 20m 거리라 출퇴근의 개념은 없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12월 말의 베트남 하노이 날씨는 한국의 늦가을과 비슷하지만 느껴지는 체감온도와 주위 환경은 현지인들의 어깨를 움츠리게 할 날씨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출근하는 공원들의 옷차림은 한국의 12월 1월의 모습과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두꺼운 파카에 바람의 습격을 막기 위해 꽁꽁 올려버린 털 달린 파카의 모습은 마치 스키장으로 입장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상황이 상황인 지라 방역에도 공장은 나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정문 통과의 여러 검사 절차가 추가로 시행되어 출퇴근 통제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까다롭게 진행되지 싶었다.
한국과 이념이 다른 베트남도 방역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문화 차이와 관습은 어떨 땐 나를 당황하게 할 때도 있었다.
연말이고 바이어의 지시사항이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으로만 진행이 되는 요즘
한국인 관리자인 본인의 위치는 어느 때보다 책임감이 막중했다.
공장 관리에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름의 스트레스를 더해 주고 있었다.
관습과 습성의 차이는 얼마 전 몸으로 직접 느낀 바가 있었다.
선적일이 다음날이라 정해진 납기 선적을 위해 야간작업은 필수였다.
납기와 품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한국의 특성상 무조건 납기는 준수해야 하는 것이 나름의 철칙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한참 야간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때 갑자기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정전' 예고 없는 정전으로 현지 공인들의 자리에선 '와우!!!' 하는 환호성이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을 통해 내 귀로 전달이 되었다. 현지인들은 정전으로 인한 이른 퇴근이 눈에 보이는지 서로를 향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환호의 아우성은 대단했다.
순간 내 마음은 감옥의 빈 공간에 철제문이 닫히는 것 마냥 가슴이 내려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지만 그날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 손님 접대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몇 해 전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빼고는..........
강원도 고향에서 요양 아닌 요양을 한 적이 있었다.
3년 전 갑자기 찾아온 경색으로 인한 어지럼증은 내 모든 일상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그때 내 나이 46살에서 47살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처음 전조증상을 빨리 찾았기 때문에. 내 발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인 대답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통보받아야만 되었다.
“놀라지 마시고 이쪽을 한번 보시죠” 하며
머리를 슬라이스처럼 자른 단면 MRI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쪽이 죽어있는 세포입니다.”라고 말하며 막혀있는 곳을 차트에 대고 설명할 때의 일은 기억하기 싫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아직 아이들도 중학생, 고등학생이고 책임져야 될 일들이 많은데 “왜?” 이런 것이 나한테. 나는 방황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 방황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책임져야 될 가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갈 때쯤 형으로부터 고향에서 잠깐 쉬며 건강을 찾아보라는 권유가 있었다. 시골에서 작은 건설업을 하는 형과 함께 2년 가까이를 요양 아닌 요양을 하며 시골 본가에서 혼자 지내야 되었다.
형은 하는 일이 집 짓는 일이라 멋진 새집을 10년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릴 때 살던 본가는 혼자 지낼 수 있었다. 2년이란 시간은 나름 심(心)적으로 안정도 되었고 몸도 많이 좋아지게 되었지만 형으로부터 받는 월급은 형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벌었다는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형에게 너무 신세를 지는 게 아닌가라는 미안함이 항상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던 13개월 전 이전 직장인 지금의 직장에서 호출이 있었다.
“이제 그만큼 쉬었으면 충분히 요양은 했을 거고 다시 복귀하지?”회사의 갑작스러운 복귀 통보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름 회사도 20년 동안 회사를 알아온 나를 요구했을 것이리라.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을 감당하기 어려워 많이들 옮겨가고 퇴사하는 경우가 잦았다며 직원들은 이야기를 했다. 회사와 나와의 필요충분조건이 성립되는 때였다.
나는 일에 대해서는 두려운 것이 없었다. 단지 총상의 후유증이 얼마큼 인지가 두려울 뿐이었다. 나로 인해 가족들이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 하나로 충분하다 생각을 했다.
이전 같으면 복귀의 손짓에 손사래를 쳤을 나였지만 2년이란 시간은 나를 이전의 아버지로 만들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사에서는 해외공장인 베트남 하노이 현 공장관리를 충실히 해 줄 것을 주문했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지만 다시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는 참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강원도 고향의 삶은 형의 배려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은 술 빚는 일까지 서울에서 배우며 나름 정신을 맑게 가지려 노력을 하곤 했지만 현실의 아버지로 돌아간 지금은 그만큼 버리는 것이 많아야 되었다..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를 갑작스러운 사고, 품질불량, 혹은 자재부족 등은
20대 초반의 철책 경계근무와 같았다.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이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전과 같은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을 어떻게 처리를 할 것이며 공장과 본사와의 원활한 소통은 어찌할지, 인원 배치는 어떻게 진행하고, 선적 계획은 어떤 식으로 세울 것인지 이런저런 모든 것을 처리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삭혀야 되는 부분이 많이 생기게 되는 것은 당연 지사라 할 것이었다.........
그래도 삭혀야 되고 삭혀야 되는 것이 아버지의 인생이지 싶다. 마치 전라도 잔칫날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홍어처럼.....
일반인들은 홍어의 썩는 듯한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된다.
그러나 삭힘의 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좋아하는 홍어전문점을 찾는 매니아도 심심치 않게 볼 수가 있지 싶다.
조금만 참다 보면 어느덧 프리미엄 홍어로 거듭날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요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도 나를 키우기 위해 홍어처럼 얼마나 많은 인내와 고통을 당신 스스로 삭히셨을지
나도 나이가 먹는가 보다 하늘을 보면 울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는지.....
아버지와 아버지 나이가 되어 같은 위치에서 느끼는 감정을 시로 담아 봤습니다. 아래 낭송은 일전에 시낭송 공동 매거진에도 한번 소개한 '홍어'라는 자작시로 상기 수필과 같이 연계해서 한번 더 낭송을 올려 봅니다.
홍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모습은 같지만 다른 향기
어떤가요 그 맛이
삭히고 삭히고 또 삭히면
코끝을 때리는 암모니아 내음
호불호 갈리는 그대 모습
어떤 이는 코를 막고 달아나며
또 어떤 이는 좋아서 사죽을 못 쓰네요
썩는 듯 썩는 듯 한 그 냄새
멀리하며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나 중독되면
잊을 수 없다는 그 맛..
세상의 모든 아버지
가슴속에 수없이 많은 홍어를 키우시네
삭히며 삭히며 삭히다 보면
언제가 중독될 그날이 올 것이니
프리미엄 홍어로 거듭날 그날이....
두 눈에 어리는 그대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
오늘도 홍어를 키우시네...
독자 여러분 건강 챙기시고 즐거운 불금되시고요 항상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