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눈이 마주쳤다. 길을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시 쉬다가도 동선이 희한하게 겹쳐버리는 남자와 계속 눈이 마주쳤다.
하얀 머리에, 구릿빛 피부, 진파란 색 눈동자를 갖은 남자는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그에게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하나, 흔히 볼 수 없는 외모인데도 아니, 평균 이상으로 매우 잘생긴 편에 속하는 데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눈이 높은 걸까?
둘, 남자는 동그란 은판같은 제법 묵직해 보이는 목걸이를 하고 있다. 패션 아이템 인 걸까? 어울리면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유형의 목걸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으로 온 혼자만의 여행을 저 남자 때문에 방해받을 순 없었다. 제주도, 그토록 바라던 여행을 오게 되었다. 그간 사람에 치이고 일에 치여 숨 쉴 틈조차 없었는데 드디어 나만의 진정한 휴식이 시작된 것이다.
"설마 사이코는 아니겠지? 우연히 동선이 겹친 걸 거야."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걸진 않았다. 호기심 많은 외국인이겠지, 하고 생각을 떨쳐 냈다.
"체크인 시간 다 됐다."
나는 묵직한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향했다. 새벽 비행에, 지금까지 짐을 들고 다닌 터라꽤나 지쳐 있었다. 걸어갈 법한 거리였지만 저려오는 다리 탓에 결국 택시를 불렀다. 택시에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2002 - Anne-Marie]
여행의 시작이 좋다. 나는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숲 속에 있는 차 후드 위에서 춤을 췄어'
'같이 노래하던 오래된 머스탱 말이야'
머릿속으로 15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부모님과 함께 온 한 달간의 제주도 여행. 부모님께서는 마냥 신나 하셨지만 11살인 나에게 제주도는 낯설기만 했다. 더구나 형제도 없어 비가 거세게 오는 날이면 부모님께서 장 보러 가신 사이 숙소에서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제주도에 온 지 2주 차]
그날도 어김없이 비가 오는 날이었다. 어린 나는 숙소에서 부모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침대에는 가지고 놀만한 인형들이 잔뜩 있었지만 초등학교 4학년에게는 그저 시시한 놀이에 불과했다. 나는 금지령이 내려진 초코바를 베어 물며 침대에 들어 누웠다. 초콜릿이 입에 묻었지만, 초콜릿을 소매로 닦았지만 뭐라 할 사람이 없기에 그저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후드득후드득'
침대 옆으로 넓게 트인 창문에 비가 부딪히고 있었다. 거세게 불다가도 얌전해지고, 잔잔하다가도 돌진하는 비는 길을 헤매는 미아 같았다.
'똑똑'
그때 창문으로 빗소리와는 구별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 분명 사람의 손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빗소리였나?"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똑똑'
그때 누군가 다시 창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분명 창문을 보고 있었는데도,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도 누군가 두드렸다.
"뭐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겠지만 모두가 그랬듯 초등학교 4학년은 겁이 없었다. 머리가 비에 젖는지도 모른 채 얼굴을 쑥 내밀어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때 창문 아래로 노란 쪽지가 보였다. 방금 두기라도 한 것처럼 비에 젖어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든 빗방울이 노란 쪽지에 닿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몸을 숙여 노란 쪽지를 주웠다.
안녕,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그냥 너랑 친구 하고 싶었어.
순간 손이 부들대며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숙소까지 찾아왔다는 것보다도, 나를 죽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보다도(다시 말하겠지만 당시에는 겁이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저 외로운 시간을 함께할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책상을 뒤적여 초록색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쪽지에 대한 답장을 써 내렸다.
안녕, 전혀 놀라지 않았어! 오히려 너무 반가운걸? 좋아, 우리 친구 하자!
초록색 종이를 두 번 접어 노란 쪽지가 있던 자리에 놓았다.
'두근두근'
안 그래도 작은 심장이 점 하나가 될 때까지 수축하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초록색 종이가 사라졌다. 눈 빠질라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한순간에 없어져 버렸다. 어리둥절했지만 딱히 할 게 없던 나는 답장이 올 때까지 창문 밖을 계속 바라보았다. 1시간쯤 지났을 까, 창문 아래로 노란 쪽지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지켜보고 있었지만 노란 쪽지는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했다. 여전히 비에는 젖지 않고 있었다.
고마워. 답장할 종이를 가져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대답해 줄지 몰랐거든. 내 이름은 매신, 11살이야.
그날 매신과 나는 5번 정도 쪽지를 주고받았다.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아침밥은 뭘 먹는지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부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매신과 나의 모든 접점이 끊길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과, 익숙하지 않은 지역에서, 그것도 어린 딸내미가 남자와 쪽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면 어떤 부모가 걱정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남들보다 몇 배는 보수적인 아버지이기에 나는 이미 암묵적으로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그렇게 나는 혼자 방에 있게 되면 몰래 그와 쪽지를 주고받았다.
네가 두는 쪽지는 왜 비에 젖지 않는 거야?
그야 내가 손으로 비를 가리고 있으니까.
매신은 투명인간인 것 같았다. 나와는 다른 차원의 사람인 건가? 혹시 귀신인건 아닐까? 매신의 존재에 대해 이런저런 예측을 했지만 왜인지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와 연결됐다는 특별한 기대는 나 또한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그저 그와의 시간을 즐겼다.
[제주도에 온 지 3주 차]
그간 날이 맑아 부모님과 죽 함께했어야 했지만 3주 차엔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아마 작은 인간의 소원을 하늘이 들어줬던 거겠지. 부모님께서 장을 보러 나가시자마자 나는 곧바로 창문을 열어 소리쳤다.
"나랑 놀자!"
매신의 대답은 역시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내 앞에 있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외쳤다.
"나랑 놀자아!"
우리는 [2002]의 가사처럼 차 후드 위로 올라 춤을 췄다. 비를 맞아 홀딱 젖으면서도, 그날 지독한 감기에 걸렸는데도, 찌그러져버린 후드 탓에 호되게 혼났는 데도, 우리는 이후로도 후드 위에서 춤을 췄다.
"하하하"
빗속에서는 여전히 내 웃음소리만이 울렸다. 더 크게 웃으면 매신의 목소리가 언젠가 나에게 닿을 것만 같아 그대로 몇 번을 더 웃었다.
"하하하"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 밤]
나는 엉엉 울었다. 부모님께서 이유를 물으셔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가기 싫다고 떼쓰며 우는 것뿐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 나는 침대에 엎드려 남아 있는 눈물을 다시 쏟아냈다. 유일했던 친구, 나와 많은 걸 공유했던 친구, 함께 비를 맞으며 뛰놀던 친구, 가만히 내 얘기를 들어줬던 친구, 이쁜 꽃을 꺾어 서로에게 선물했던 친구, 이제 모든 게 끝이었다. 우리는 핸드폰도 없었고 SNS도 몰랐기에 소식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내가 제주도를 떠나는 순간, 영원한 작별인 셈이었다.
'똑똑'
우는 소리에 매신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똑똑'
나는 얼굴을 묻고 계속 울었다.
그때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노란 쪽지가 옆에 놓였다.
너무 슬퍼하지 마. 꼭 다시 만날 거야. 난 그러리라 믿어.
눈물을 벅벅 닦아내고 열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매신이 내 앞에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그에게 답장을 썼다. 부분적으로 번져있는 자국은 빗물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아마 지금도 구분할 순 없을 거다.다만 꾸역꾸역 쓰다가도 왈칵 나오는 눈물 탓에 마지막으로 건넨 쪽지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용은 매신, 그 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과연 그날 작별인사로 어떤 말을 건넸을까. 그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