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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16. 2024

어떤 남자가 저를 계속 쫓아와요

[달조각을 모으는 남자] 2화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아직 오후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잠이 쏟아져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오늘 할게 많은데,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나는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잠이 들었다.

'툭툭'

몇 시간이 흘렀을 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15년 전에도 비가 많이 내렸었지, 하며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시원하고 기분 좋소리, 몸 안으로 흩날리던 먼지를 다시 차분하게 잠재워줄 그런 아늑한 소리였다. 나는 침대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떨어진 빗물이 튀어 이마얹었다.


"냄새 좋다."

비에 젖은 흙냄새가 바람을 타고 코끝에 닿았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촉촉한 이슬이 폐를 따뜻하게 데우는 것 같았다. 빗물을 담은 바람은 작은 깃털이 되어 나의 머리칼과 솜털을 쓸어주었다. 그때 문눈이 마주 남자가 떠올랐다.  

"잘생기긴 했었지."

빛에 닿아 더 윤이 나던 하얀 머리칼, 보기 좋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 파도 같이 깊은 푸른 눈동자, 적당히 붉은 입술.

"크음-"

눈을 감고 하자니 괜히 변태가 된 것 같아 코를 쓸고 창문을 닫았다. 빗물은 다시 창문에 부딪혀 평온한 오르골 소리가 되어주었다. 침대에 눕고 핸드폰을 들었다.

"벌써 11시라고?"

이런, 그새 6시간이나 잠든 것이었다.

"제주도 첫날부터 늦잠이라니,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이렇게 보낼 순 없어!"


나는 외투를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

당연히 우산은 없었다. 잠들다 내리던 비였기에 우비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 소식에 당황하긴 했지만 그래도 숙소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비를 맞아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비를 맞으며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이어폰을 꽂고 [2002] 노래를 틀었다. 날의 추억 때문일까, 비가 오는 날이면 꼭 이 노래를 듣고 싶어 진다. 비가 이어폰에 들어가 감전이라도 당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바다 옆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다. 바다는 파도가 되어 모래를 덮고 쓸기를 반복했다. 이어지는 노랫소리에 파도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숲 속에 있는 차 후드 위에서 춤을 췄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나왔다.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 곧바로 몸을 들썩였다. 차 후드 위에서 뛰어놀던 11살의 그때처럼 다시 빗물 속에서 춤을 췄다. 빗물은 머리와 옷, 속옷을 지나 신발까지 모든 허물을 젖게 했다. 짧은 머리칼에 맺은 빗물은 또다시 물방울이 되어 대지의 빗물이 되었다.


그렇게 마지막 피날레 포즈를 취한 후 아이돌이 그러듯 숨을 거칠게 아쉬었다.

"후, 좋았다."

어차피 다시 젖을 머리를 털며 눈을 덮은 빗물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때 몰아치는 파도 앞으로 한 명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빗물이 아직 덜 닦인 모양인지 남자의 형태는 아른대고 있었다.


'누군가 있었던 거야?'

민망함이 몰려왔다. 엄청난 춤사위, 그것도 성인이나 된 사람이 거센 비를 맞으며 이어폰을 꽂고 온몸을 털어댄. 다시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하얀 머리칼, 구릿빛 피부, 푸른 눈동자, 분명 그 남자였다. 남자는 가만히 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아했던 파도는 그를 기점으로 공포가 되어 나를 덮치려 했다. 내 모습도 충분히 공포물이었으나, 파도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남자는 호러물 자체였다. 나는 이어폰을 빼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린 걸까, 폐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나는 가로등 없는 길거리에서 핸드폰 후레시에 기대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젠장!"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저-저기요."

"꺄아악!"

모든 긴장감이 정도 이상을 넘어버린 나는 온몸에 소름을 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울었다.

"살려주세요. 아직 젊단 말이에요."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눈앞에는 중년 여성이 보였다. 서류가방을 들고 있는 걸로 보아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모양이었다. 중년 여성은 나에게 우산을 씌어주며 었다.

"괜찮으세요?"


내 몸은 넘어지고 달리기를 반복하면서 심하게 얼룩져 있었다. 중년 여성은 나를 부축이며 일으켜 세웠다.

"일단 저기로 들어가요."

중년 여성이 가리킨 곳은 작은 쉼 센터였다. 나무 간판 아래로 경로당이라 쓰여 있는 걸 보니, 낮에는 노인의 광장인 듯했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놀라 마비된 다리를 절뚝며 쉼 센터 들어갔다. 다행히 쉼 센터엔 아무도 없었다. 중년 여성은 따듯한 차와 담요를 건네주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울컥,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물론 이미 울었지만, 그래서 마스카라가 번져있지만 말이다.

"어떤 남자가 계속 저를 쫓아와서요. 혹시 하얀 머리칼, 구릿빛 피부, 푸른 눈동자의 남자를 보신 적 있나요?"

중년 여성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가로저었다.

"아뇨, 여기서 오래 살았는데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봤다면 바로 기억을 했을 텐데요."


중년 여성의 말이 맞았다. 남자의 외모는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특징으로 가득했다. 나는 머리를 감싸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빗물이 눈을 가려 파도가 사람처럼 보인 걸까?'

부정하려 해 봐도 분명 사람이었다. 분명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던 남자였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거울에는 만신창이가 된 여자가 주저 않아 떨고 있었다. 15년 전 그날도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일들로 가득했다. 그날은 투명인간이, 오늘은 알 수 없는 남자가 게 들어왔다.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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