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제주도에서 쪽지를 주고받던 정체 모를 사람. 당시에는 분명 누군가와 함께 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허상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증거가 될 노란색 쪽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만 가지고 믿기에는 너무 당황스러운 얘기들로 가득했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던 사람, 그가 건넸던 비에 젖지 않은 쪽지.
제주도에서만 벌써 두 번째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나 겪으니 이제는 나 자신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차분해지자.'
나는 차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중년 여성은 내 손을 감싸며 말했다.
"신고라도 할까요?"
너무 감사했지만, 그냥 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나는 고개 저어 사양하고 쉼 센터에서 밤을 보내도 되냐고 물었다.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땐 정말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여성은 쉼 센터 키를 쥐어 주었다. 조심히 있으라는 말과 함께 나를 안아주고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꼬르륵'
배가 너무 고팠다. 벌써 공복 9시간이니 그럴 수밖에. 쉼 센터에 몇 가지 다과가 준비되어 있긴 했지만 신세 지는 마당에 몰래 꺼내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허기를 잊기 위해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물론 불은 끄지 않았다. 밝게 빛나고 있는 조명 아래 담요를 덮고 웅크린 채 눈을 붙였다. 여행 온 마당에 너무 처량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그래도 비 오는 날 길거리를 떠돌던 좀 전의 상황보다는 괜찮아졌다며 위안 삼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우선 잠을 자자, 아침이 되면 그때 생각하자.'
젠장, 잠이 오질 않는다. 울타리 위로 수많은 양을 보내고도 잠에 들지 않았다. 설마 여기까지 따라왔을 남자가 문을 부수고 자신을 덮치는 상상은 구불해진 눈꺼풀을 다시 뜨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수면을 포기하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쏴아-'
여전히 빗소리는 듣기 좋았다. 언젠가는 시끄럽게 들렸을 시계 초침 소리는 빗소리에 얹혀 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툭툭'
창문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가만히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더 고요해지길 기다렸다.
'똑똑'
그때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분명 빗물과는 구분되는 소리였다. 고요했던 마음은 큰 돌덩이가 떨어진 듯 가운데서부서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겁에 질려 몸을 웅크렸다.
'정신 차리자'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쉼 센터 안에 무기가 된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이건 허상이 아니다. 설령 허상이라 해도, 우선 살고 보는 게 먼저다.
그때 다시 창문이 두드려졌다. 이번엔 두 번, 한 번으로 나눠져 두드려졌다.
'똑똑- 똑'
"이, 이건..."
오른손에 들려있던 야구방망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15년 전, 그때 그날이 떠올랐다.
'똑똑- 똑'
기억났다. 이건 매신과 나와의 암호였다.매신과 내가 헤어졌을 때 그가 건넸던 마지막 쪽지였다.
[똑똑- 똑] 이건 내가 왔다는 신호야. 두 번 그리고 한번. 그러니까 기억해 줘.
"매신?"
창문은 한번 더 두드려졌다.
'똑똑- 똑'
나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내고 굽어있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그리고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정말 매신일까?'
창문까지 3초,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쳤다.
'허상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지금도 내가 미쳐있는 걸까?'
끊임없는 의문이 반복되는 동안에도 나의 두 발은 멈추지 않고 창문으로 걸어갔다. 이내 창문에 다다르자 멈춰 서고 손을 들었다. 그리고 똑같이 창문을 두드렸다.
'똑똑- 똑'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는 다시 두드렸다.
'똑똑- 똑'
이상하다, 분명 누군가 있었는데, 정말 허상이었던 걸까, 나는 창문을 열었다. 머리를 밖으로 빼내어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정말 내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그렇게 다시 고개를 빼내려는 순간 창문 아래로 노란 쪽지가 보였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15년 전의 그날이 꿈이 아니었다. 허상이 아니었다. 나만이 지은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대로 쉼 센터 문을 열고 나와 창문아래 노란 쪽지를 주웠다.
소라, 안녕. 오랜만이야. 여기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시간 괜찮으면 내일 너와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쪽지 맨 아래쪽에는 '그때 그 장소, 그때 그 시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응, 알겠어! 내일 거기로 갈게!"
언제나 그랬듯 그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언제나 드랬듯 앞에 있을 그를 상상하며 크게 외쳤다.
매신과 자주 놀았던 곳, 양떼목장이었다. 우리는 종종 눈길이 닿지 않는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놀곤 했다. 양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고, 잔디에 누워 낮잠을 자고, 깔깔거리며 쪽지로 대화하던 우리만의 비밀 장소였다. 목장이 시작하는 10시에 맞춰 8시부터 놀다가 9시 반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인적 없는 우리만의 공간이 좋았다. 사람 손 타지 않은 자연 속에 매신과 나만이 홀로 여행온 듯한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매신이 양에게 먹이를 줄 때면 건초가 공중에 두둥실 떠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매신은 정녕 귀신인가! 하고 놀라기도 했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마법 장소였다.
나는 비 내리는 자리에 서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내 가슴팍에는 매신이 준 쪽지가 있다. 좀 전과는 다른 흥분에 심장은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허상이 아니었다는 안도감보다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순수한 설렘 때문이었다. 내 머릿속은 조금의 여백도 남겨 두지 않고 매신과 함께 했던 기억들로 가득 채워졌다. 나를 쫓아오던 이름 모를 남자는 잊힌 지 오래였다. 불과 3분 전이긴 하지만, 왜인지 잊은 지 오래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