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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22. 2024

제주도에 귤나무가 많은 이유

[달조각을 모으는 남자] 4화

드디어 아침이 되었다. 드디어 그를 본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그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 깨끗한 물로 몸을 적셨다. 어젯밤의 수고가 두피로 떨어지는 물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다려진 옷을 꺼내 입었다. 분명 늘 입던 옷과 늘 하던 화장 텐데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 자꾸만 새어 나오는 미소 탓에 침을 삼켰다. 오랜만의 떨림, 오랜만의 설렘이었다. 향수에 흥분을 그대로 담아 목과 손으로 다시 옮겼다.  


현재 시간은 오전 7시 40분. 다행히 15년이 지났는데도 양 떼 목장에 경비원은 없는 듯했다.

"아직 춥네."

차갑게 불어오 바람에 목을 아래로 구겨 넣었다. 6월 오전은 아직 서늘한 듯했다. 나는 해가 완전히 뜨기를 기다리며 팔을 포개고 풀 밭을 천천히 걸어갔다. 어젯밤 내렸을 빗물은 사판이 되어 풀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짧은 굽 위로 발등에 닿는 시원한 이슬은 내 마음에 무지개를 피냈다.

"그때 그 나무다!" 

눈앞으로 큰 고목나무가 보였다. 15년 전, 햇살이 따가울 때면 매신과 함께 나무 아래 그림자로 도망 오곤 했었다. 나는 15년 전처럼 나무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고목나무는 나뭇잎이 된 내 머리칼을 기분 좋게 쓸어 주었다.

'좋다-'


줄기에 잠들었던 물 한 방울이 콧등에 떨어졌다. 나는 코를 문지르며 눈을 떴다. 그때 발 옆으로 노란 쪽지가 보였다. 나는 서둘러 노란 쪽지를 웠다.

와줘서 고마워. 내가 얼굴을 보이면 놀랄 것 같아서 이렇게 쪽지를 썼어. 나는 너의 뒤편, 고목나무 뒤에 서있어. 준비가 되었다면 와줄래?

맙소사, 드디어 매신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이미 여기에 있었구나,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매신에게 15년간 길러온 성숙미, 11살 때와는 다른 우아함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마음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 고목나무 뒤쪽으로 걸어갔다.

"꺄아악! 너, 너는!"


눈앞에는 다름 아닌 어젯밤 그 남자가 서 있었다. 하얀 머리칼, 구릿빛 피부, 푸른 눈동자. 나는 얼어붙은 채 그대로 주저앉다.

'저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내가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자 남자는 왼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에는 15년 전에 내가 매신에게 건넸던 초록 쪽지들이 들려 있었다.

"나야, 매신!"

매신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그 쪽지는..."

나는 버벅거리며 었다.

"너, 가 정말 매신이야?"

매신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바람 따라 흩날리는 하얀 머리칼 고목나무 그림자에 가려 회색빛을 고 있었다.

", 그때 그 아이가 나야."

나는 매신의 손을 잡 일어서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다. 매신은 부끄러운 듯 내가 해댔던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서 어제부터 계속 나를 따라왔던 거라고?"

그를 향해 얼굴을 죽 들이밀자 매신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커다란 손 틈 사이로 그의 얼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 심연의 바다 같은 푸른 눈동자는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맞, 맞아. 인사할 타이밍을 보고 있었어. 어젯밤은 우연히 마주친 거지만… 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가 춤을 추고 있더라고. 전에 차 후드 위에서 같이 췄던 춤이 생각나서 그대로 계속 봐버렸어. 가 도망갈 줄은 몰랐는데, 놀라게 해서 미안해."

나는 순간 어젯밤에 췄던 춤사위가 생각나 고개를 숙였다. 모르는 사람도 아닌 매신에게 그런 추한 모습 보이다니, 얼굴이 뜨겁게 불타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주저앉았다. 부끄러움이 몰려와 그런 것도 있었지만 자꾸만 마주친 무서운 남자가 매신이라는 걸 알게 되니 안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진정은 좀 됐어?"

우리는 나란히 풀 밭 앉았다. 지가 이미 젖긴 했지만 매신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엉덩이 밑에 깔아 주었다. 동시에 그의 왼손에 들려있던 카디건을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 조금 놀랐던 것뿐이야."

나는 카디건 소매를 만졌다. 그의 향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전에 알고 있던 향과는 다 제법 성숙해진 남자의 냄새다.

"셔츠랑 카디건 빌려줘서 고마워."

"뭘, 가져온 보람이 있네. 네가 추워할 것 같았거든. 예전에도 추위를 잘 탔었잖아."

15년 전, 내가 코를 훌쩍 때면 매신은 늘 미리 준비한 두툼한 담요를 걸쳐 주었다. 나의 허상 속 일부일 거라 생각했는데 사실이었다니.


"그랬었지."

나는 미소 지으며 매신을 바라보았다. 그가 너무 반가워 당장이라도 부둥켜안고 싶었지만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함께한 추억을 얘기할 때면 웃음이 났지만, 매신의 얼굴을 보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거리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5년 만에 보게 된 얼굴, 거기다 도통 적응되지 않는 외모. 잘생긴 이목구비도 한목 하긴 했지만 하얀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의 남자가 한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질적이었다. 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매신외국사람인거지?"

"하하하"

그는 몇 분을 내리 웃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완전 한국 사람이야."

"그, 그래?"

"처음부터 말해줄게. 얘기가 길어지겠지만."

매신은 계란샌드위치와 딸기우유를 건넸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선호했던 아침메뉴였다. 역시 그는 나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매신은 하늘을 바라보 숨을 내쉬었다. 사연을 말할 준비를 하는 듯했다. 나는 샌드위치를 입에 물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나는 사실 바다 사람이야."

"켁-"

잘못 들은 걸까, 미처 넘기지 못한 샌드위치가 기도로 넘어갔다. 매신은 딸기우유 뚜껑을 열어 내게 건넸다.

"괜찮아?"

"응, 마저 얘기해 줘."

사고가 정지되긴 했지만 매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사람은 두 종류로 뉘어. 육지 사람과 바다 사람."

"면서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어."

그는 내 입술에 묻은 딸기 우유를 손등으로 닦며 말했다.

"바다 사람의 피부는 바다처럼 투명해서 육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어. 그렇다면 당연히 육지 사람은 바다 사람을 무서워하겠지?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그래서 정부는 육지 사람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바다 사람의 존재를 숨긴 거야. 그게 너가 바다 사람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한 이유고."

그는 잠시 멈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육지 사람 중 몇몇만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그들은 '교류자'- 그러니까, 지를 대표해 바다와 교류하는 사람이야. 육지 교류자는 해 목걸이를 통해 바다 사람을 볼 수 있."


나는 한입 베어문 샌드위치를 옆에 두고 물었다.

"해 목걸이?"

"류를 하기 위해서 바다 교류자는 육지로, 육지 교류자는 바다로 들어가야 해. 서로의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 바로 달 목걸이와 해 목걸이야. 바다 사람은 육지로 올라가기 위해 달 목걸이가 필요하육지 사람은 바다로 내려가기 위해 해 목걸이가 필요해. 목걸이는 교류자라는 걸 표시하는 동시에 서로의 영역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나게 해 줘. 아, 육지 사람은 목걸이가 없어도 바다 사람에게 보이긴 하지만 말이야."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답변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데이터의 양을 넘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언어들은 내 뇌를 판판한 종이처럼 펄럭이게 만들 뿐이었다. 나는 종이를 조금씩 접으며 주름을 만들었다. 우선 이해한 것부터 천천히 물어보고자 했다.

"그럼 너는 바다 교류자인 거야?"

"아. 15년 전 너와 처음 만났을 때도 바다 교류자인 상태였어. 당시 최연소 교류자였던 나는 나이가 너무 어려 육지로 넘어갈 때만 달 목걸이를 착용했고 머무는 동안에는 착용하지 않았어. 어린아이가 교류자 마크를 달고 있으면 육지 교류자에게 혼선을 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때는 가 내 모습을 보지 못했던 거야."


"그러니까 너는 원래 바다 사람이고, 지금은 육지와 교류하기 위해 잠시 넘어왔다는 거지?"

"그렇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뭔데?"

" 목걸이의 달이 모두 부서져 버렸어."

나는 매신의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둥근 은 목걸이 달이 부서  판만 남아있던 것이었다.

매신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마지막 입무귤나무 씨 교류였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귤나무 씨를 모 그렇게 다시 로 돌아 했는데 귤나무 씨를 담 가방을 소매치기당한 거야. 교류자가 아니면 교류한 모든 것들은 바닥에 흘러지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도둑은 아무런 득 보지 못했겠지만, 귤나무 씨는 제주도 여기저기에 흩뿌려졌을 거야. 아마 조만간 제주도 귤나무가 가득 라겠지."


매신은 둥근 은 목걸이를 만지작 거렸다.

"마지막 입무를 망친 것도 모자라 당겨진 팔에 넘어지면서 달 목걸이 산산조각 났어."

"그럼 어떡해?"

"다행히 방법 있어. 깨진 달조각을 다시 모으는 거야."

매신이 들고 있는 둥근 은 목걸이는 마치 달의 뒷면 같았다. 어두운 명함 아래 크레이터가 파여있는 목걸이. 거칠었지만 이뻤어두웠지만 편안했다. 그는 목걸이를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달 목걸이는 6개의 조각으로 이뤄져 있어.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 삭. 부서질 때도 마찬가지로 6개의 조각으로 깨지고 각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원래 있던 자리?"

"응, 바다 교류자는 달 목걸이를 얻기 위해 숨겨진 달 조각을 직접 찾아야 해. 그래야만 정식 교류자가 될 수 있."


그의 이야기가 조금씩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전에 달 조각을 찾았던 곳 그대로 다시 가되는 거 아니야?"

"아. 문제는 너무 오래전이라 장소가 기억나질 않는다는 거야. 16년 전이니까... 꽤 난감하게 됐어."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매신을 바라보았다. 순간 목에 침이 두 번 삼켜져 말을 절었다.

"못, 못 찾으면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거야?"

매신은 바람에 흐트러진 카디건을 다시 여매주며 했다.

"다행히도 그건 아니야. 블루문이 뜨면 몸이 자동으로 투명해지면서 바다로 돌아가게 ."

"그럼 블루문이 뜰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근속 연수를 채운 교류자 달 목걸이 을 내는 불가사리를 만드는 주 재료거든."

"빛을 내는 불가사리?"

"응, 심해를 밝혀주는 바다의 별이야. 우리에겐 훈장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나처럼 근속 연수를 채웠더라도 달 조각을 잃어버리면 빛나는 불가사리를 만들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짚었다.

"밌다, 바다의 세계."

"하하, 나는 오히려 육지가  재밌어. 종종 근무지를 이탈해 선임에게 혼날 정도야. 지금도 모두들 내가 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음, 그런데 달 목걸이가 있어야 너의 모습이 육지 사람에게 보인다고 했잖아. 지만  목걸이는 모두 부서진 상태고...  너가 보이는 거지?"

"사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 왜 너만 나를 볼 수 있는 건지-."

"나만 너를 볼 수 있다고?"

"응, 너만."


매신은 박수를 두 번 며 말했다.

"늘은 여기까지! 샌드위치 마저 먹어. 아까부터 듣기만 하고 도통 먹질 않았잖아."

나는 샌드위치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블루문이라-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딸기우유로 텁텁해진 목을 적시고 계산해 보았다. '오늘은 6월 18일, 블루문은 8월 20일에 뜬다. 그렇다면 앞으로 정확히 63일 후에 블루문이 뜬다.' 

나는 빈 샌드위치 비닐을 구기며 일어섰다.

"달 조각 찾는 거 내가 도와줄게."

"안 그래도 돼.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거든. 상당히 지루한 여정이 될 거야."


15년 전, 외롭기 짝이 없던, 홀로 침대에 누워있 나에게 손 내밀고 놀아주던 그이다.

그때 매신이 없었더라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그저 지겨운 인형 놀이를 하다 잠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난 그날의 마법 같은 떨림에 매일을 설레며 살았다. 허구일까, 하는 의심 들긴 했어도 눈 감으면 선명한 그날의 기억에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나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물한 그에게, 이제는 내가 언가를 선물할 때이다.

"그냥 전처럼 너와 함께하고 싶어서 그래. 마침 할 것도 없고 말이야."

"그렇지만..."

나는 매신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같이 찾아보자, 응?"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붕 뜨는 그의 하얀색 머리칼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럼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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