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을 Jul 23. 2024

그를 집에 들인 이유는 뭘까

[달조각을 모으는 남자] 5화

[D-62]


"왔어?"

그는 고목나무에 기대 있었다. 넓은 어깨를 덮고 있는 하얀 셔츠가 바람을 타고 펄럭다. 셔츠가 벌어짐에 따라 매신의 구릿빛 가슴팍이 조금씩 비쳤다.

"응, 많이 기다렸어?"

"그럼, 15년을 기다렸는걸."

"하하, 하여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어제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매신과 나는 그새 가까워져 있었다. 햇빛 아래 고목나무는 시원한 그림자를 만들어 그의 머리칼을 덮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릿결파도 위로 일렁이는 햇빛의 잔상 같았다.

"어디를 먼저 가볼지 생각해 봤어?"

매신은 오른손으로 쥔 종이를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대한 기억나는 대로 적어봤어."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매신의 정체를 알아서일까, 이제는 남자의 냄새보다 바다의 시원한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가 펼친 종이 제주도 지 였는데 빨간 색연필 4군데가 동그랗게 표시되어 있었다.

"오, 제주도를 전부 돌아야겠는데?"

매신은 고개를 숙이며 어깨를 축 내렸다. 아끼던 인형을 뺏긴 대형 강아지 같았다.

"시 나혼자 가야겠어"

"아니야, 마침 제주도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싶었거든."

매신은 고개를 들고 웃었다. 머리부스스해 질 때까지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나는 색연필로 표시된 곳 중 가장 가까운 장소를 가리켰다. 애월읍에 있는 넓은 정원이었다.

"여기부터 가볼까? 그런 다음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 되겠다."

", 그러자."


정원은 애월읍에서 나름 유명한 장소인지 가는 경로가 곳곳에 표기되어 있었다. 우리가 있는 위치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교통수단은 도보 자전거였다. 나는 표판 위에 얹은 먼지를 쓸며 말했다.

"버스로 가는 방법없는 것 같고, 도보로는 1시간 40분, 자전거로는 23분이네. 자전거 타고 갈까?"

매신은 펄럭는 내 치마를 보며 말했다.

", 아무래도 자전거는 불편할 것 같아. 그것도 그렇고 사람들 눈에는 내가 안 보여서 빈 자전거 한 개가 굴러가는 걸로 보일 거야."

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인용 자전거는 어때? 너가 내 뒤에 타면 되잖아. 치마야 갈아입으면 되고."

"너만 괜찮다면. 그런데 나 조금 무거울 텐데."

"괜찮아. 2인용 자전거는 힘이 아니라 기술이거든!"

매신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탁할게."


우선 치마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급히 주위를 둘러봤지만 너무 외곽인 일까, 한참을 두리번거려도 바지를 살 만한 옷집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물쭈물거리다 그에게 돌아와 말했다.

"혹시, 잠깐 내 숙소로 같이 갈래? 옷을 살만한 곳이 없어서 갈아입고 오는 게 빠를 것 같아."

매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볼이 상기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쏟아지는 고목나무 늘에 제대로 알아볼 없었다.

"그럼."

그와 함께 숙소로 걸어가는 길. 15년 전에는 매신이 내 방에 들어온 적도, 같이 침대에 엎드려 쪽지를 주고받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같이 침대에 드러눕는 것도 아닌데.


"날이 참 좋다."

매신은 팔을 양 옆으로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뭐가 좋은지 알아? 내가 하고 싶은데로 다 할 수 있다는 거.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기지개 켤 수 있다는 거. 어쩌면 그래서 육지가 내게 좋았던 걸지도 몰라."

그를 따라 팔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자연의 입김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나도 바다로 가면 다시 이어폰 끼고 마음껏 춤출 수 있겠지?"

매신은 내쉬는 숨에 웃음을 실어 보냈다. 

"하하, 그렇지."

나도 그를 따라 웃었다. 그늘 없이 비추는 햇살은 뜨겁지 않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이런 여유가 얼마만일까, 이런 포근함얼마만일까, 심장은 계속 쿵쾅거렸지만 별개 평온함이 느껴졌다.




"여기야"

나는 숙소를 가리켰다. 작은 나무집에 쪽마루가 붙어 있는 집이었다. 연식이 제법 오래되긴 했지만 넓게 트인 쪽마루가 마음에 들어 선택한 곳이었다. 매신앞에 있는 벤치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다녀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꼬르륵'

그때 매신의 배에서 무척이나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얼굴을 붉히 배를 쓸었다.

"아침먹는다는 걸 깜빡해서, 그렇게 배고프진 않아."

"하하, 우리 밥 먹고 천천히 출발할까?"

매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빨개진 것 같았지만 모른 채 했다. 어쩌면 나도 빨개졌기에 서로 모른 척 넘어간 준 걸지도 모르겠다.


'청소는 했었나? 설거지는? 속옷을 널어두진 않았겠지?' 

벤치에서 일어나 문을 열기까지의 2분. 온갖 걱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갔다. 지금껏 한 번도 남자를 내 공간에 들인 적이 없었다. 친하다 할 수 있는 친구조차 집에 들인 적 없었는데, 왜 매신은 가능 걸, 이유를 생각하는 내 손은 어느덧 문고리를 틀고 있었다.

"잠, 잠깐만!"

나는 열린 문 틈새로 빠르게 들어가 거실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어제의 나는 꽤나 기특했다. 문을 활짝 열고 손짓했다.

"들어와."

분명 널널 입구는 그에게 좁 듯 했다.  머리가 문 위쪽에 닿으려 하 서둘러 그의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갑자기 들어올린 까치발 종아리가 저긴 했지만 이내 느껴지는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이 모든 통각을 잊게 했다. 이슬을 가득 머금은 듯한, 가벼우면서도 촉촉한 머리칼이었다.

"고마워."

"아, 아니야."

이번에도 말을 절었다. 자꾸만 왜 이러는 거지, 분명 그의 머리칼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걸 거야,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냉장고를 열 재료를 지만 이렇다 할 재료 없었다. 매신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가 요리해도 ?"

그의 향은 무의식적으로 내 얼굴을 틀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렇게 우리의 눈이, 우리의 시선이 일직선으로 맞닿았다. 내쉬는 호흡마저 닿아버릴 것만 같은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급히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그럼! 그런데 재료가 없어."

매신은 자신의 둥근 은 목걸리를 흔들었다.

"맡겨만 줘."

그는 목걸이 오른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러자 은 목걸이 위로 바다거품이 생기더니 그의 손이 쑤욱하고 팔꿈치까지 들어가 버렸다. 나는 눈을 꿈뻑이며 입을 벌렸다.

"이게 뭐야?"

"교류자의 목걸이는 물건을 저장는 기능이 있어. 짐과 먹을거리, 그리고 교류한 어떤 것들을 보관하기 위함이지."

"그럼 귤나무 씨도 목걸이에 넣어놨으면 됐던 거 아니야?"

"하하, 그렇지. 변명하자면 넣으려 하는 찰나 소매치기 당한 거야."

그의 손은 다시 바다거품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올리브유와 파스타 면이 들 있었다.

"파스타 어때? 육지 음식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거거든."

"좋지."


'보글보글'

매신이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 나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도와주겠다 일어서도 매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나를 앉혔다.

'누군가 나에게 밥 해주는 게 얼마만이람.'

나는 소파 등에 상체를 싣고 몸에 힘을 뺐다. 파스타 면을 삶는 소리, 프라이팬 위로 기름이 지글대는 소리, 행복해서 그만 눈이 감길 것 같았다.

'안돼, 잠에 들 순 없어.'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더 누리고 싶었다. 나는 고개에 힘을 실어 매을 바라보았다. 걷어 올린 하얀 셔츠 소매,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앞치마. 15년 전의 그 아이가 이렇게나 커 버렸구나, 매신의 어린 모습을 본 적 없으면서 왜인지 미소가 지어졌다. 을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만 눈 감아 버렸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는 자장가가 되, 문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선풍기가 되어 나는 그만 눈 감아 버렸다. 그렇게 나는 그만 잠들어 버렸다.

이전 04화 제주도에 귤나무가 많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