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을 Jun 26. 2024

사랑에 빠지는 순간

[잡담술집] 26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꽤나 진지한 고민에 빠져 그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던 이월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피드윌이군요."

"놀라게 했다면 죄송해요."

이월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발에 걸려 있던 나뭇가지를 주웠다.

"아니에요. 그냥 생각 중이었어요."

"그녀와 뭔가 잘 되지 않았나요?"

았던 나뭇가지를 떨어뜨린 이월은 다시 주우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상담한 것도 있고, 이월의 나이에 한숨 쉴 일이 사랑 밖에 더 있나요?"

"하하, 그런가요."

"그런데 사피는 어디 가고 혼자 있어요?"

"술 마시고 있을 거예요. 저는 바람 쐴 겸 나온 거고요. 아, 사피가 술을 마시고 있지 않더라도 같, 같이 나올 순 없었을 거예요."


말을 버벅거리며 손사례를 치이월은 다시 고개를 내리고 중얼거렸다.

"사피와 같이 있고 싶네요."

"데이트 가자는 말은 해봤어요?"

"아직 못했어요. 사람이 많기도 고, 취기를 빌려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멋지네요."

이월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였다.

"뭐 가요?"

"보통 술의 힘을 빌려 마음을 전하기도 하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술을 마시면 그 순간을 완벽히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그날의 감정과 사피의 대답을 흐리게 간직하고 싶지 않아요."

"역시 멋있는 남자네요."

이월은 다시 바닥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시간이 이렇게나 지체되었는걸요."


그는 다리를 포개 앉고 이월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왜 좋아하게 된 거예요?"

이월은 깊어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 같이 뿌연 구름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원래 사피는 다 같이 모일 때만 어울리는 사람이었어요."

"지금이랑 똑같네요."

"맞아요."

이월은 바람결에 펴진 소매를 접으며 말을 이었다.

"3년 전쯤, 숙제를 깜빡한 탓에 방과 후 심부름을 하게 된 적이 있었어요. 프린트물을 엮어 클립으로 집는 간단한 잡일이었죠. 그렇게 선생님께 프린트물을 받고 교실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문을 열어보니 사피가 제 자리에 앉아 있더라고요. 정확히는 제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어요. 딱히 친하지 않았던 사이라 조금은 당황스러웠죠."

"벌써 몇 년 전의 일일 텐데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네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이월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럼요. 그날만큼은 잊을 수 없어요."


파란 칠판에 추억이라는 하얀 분필로 그날의 순간을 그렸다.

"나무에 걸린 노을빛이 이뻤던 건지, 그녀의 향이 제 코 끝을 스쳤던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빠르게 뛰었어요. 그 장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죠."

이월은 소리 내어 웃었다.

"어쩌면 사피의 입에서 흐르는 침 때문에 계속 보게 된 걸 수도 있어요."

"하하, 이월도 참 짓궂네요."

이월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검은 칠판에 기억이라는 분필로 그날의 장면을 그렸다.

"사피가 엎드린 책상 위로 저도 나란히 엎드려 그녀를 바라봤어요. 멀리 서는 알 수 없었던 그녀의 긴 속눈썹과 볼에 난 솜털, 그리고 새근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들렸죠."

"변태끼가 조금 있군요."

이월은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놀리지 말아요. 저도 제 모습이 이상해 보여 바로 일어났요.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이어 달라는 신호였다.

"제가 일어난 소리가 컸는지 잠에서 깬 사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봤어요. 처음으로 마주친 사피의 어찌나 맑은 지 이제야 보게 된 본인이 원망스러울 정도였죠. 연한 회색 동공은 정말이지 아름다웠어요."

이월은 치아 사이로 은은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사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사피는 심부름을 도와줬어요. 너무 긴장한 탓에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책상 하나를 끼고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죠."

"오, 둘이 얘기한 적이 있긴 하네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긴 하지만요..."

"버벅거리는 모습을 사피가 이상하게 보진 않았나요?"

"그날 이후 둘이 얘기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는 젝스처럼 턱을 만졌다. 정리했던 수염은 어느새 조금 자라 있었다.

"음, 아까 말했던 것처럼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데이트 신청은 언제 할 생각이에요?"

"이번주 내로요. 잘할 수 있을모르겠지만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이월의 왼쪽 옆구리에 묻혀있는 목도리를 발견했다. 연한 갈색 톤의 꽤나 두툼해 보이는 목도리였다.  

"목도리가 이쁘네요."

이월은 목도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두르지도 않을 거면서 왜 들고 왔는지 모르겠요."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언젠가 쓸 일이 있나 보죠."




화장실에서 막 나온 사피는 젖은 손을 허벅지에 닦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둘은 밖에서 얘기 중 인가 봐요. 낯도 많이 타는 애가 그새 친구를 사귀었다는 게 놀라워요."

"남자들의 대화라도 하고 있나 보죠."

사피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도 잠시 여자들의 대화를 나눌까요?"

오른쪽에 있던 의자를 뒤로 당기며 그녀는 대답했다.

"좋죠, 여기앉으세요."

사피는 마시던 잔을 들고 그녀의 옆앉았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구애가 성공해 합석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검은색 비닐봉지에서 핑크색 포장지를 꺼냈다.

"같이 먹을래요?"

"좋죠."

 그들은 설탕으로 코팅된 땅콩을 집어 먹었다. 무게감 있지만 포만감이 적어 안주로 재격이었다.

"오늘따라 손님이 많은 것 같아요. 간판이 눈에 띄지 않아 사람들이 올까 했는데 말이에요. 저만의 가게가 없어진 기분이에요."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오늘처럼 다 같이 올 때도 있고, 혼자 올 때도 있어요."

사피는 고개를 틀어 젝스를 바라보았다. 주문이 밀렸는지 자신의 옷깃에 갈색 시럽이 묻지도 모른 채 손동작을 재촉하고 있었다.  

"혼자 올 때마다 브라운이 말동무를 해줬는데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어 보이네요."


사피는 혼자 입술을 적셨다. 제법 도수가 강할 텐데도 인상 쓰지 않고 홀짝는 걸 보면 독한 술에 익숙한 듯했다.  

"혼자 술 마시는 걸 즐겨하세요?"

"최근 들어 하기 시작했어요. 매력 있더라고요. 고독이라는 침묵 속에 나만의 공간이 열린 듯한 묘한 느낌이 있어요."

"벌써 그 맛을 알다니, 사피는 어른이네요."

"하하, 그것도 그렇고 요즘 고민이 있어서요."

그녀는 앞으로 넘어온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며 물었다.

"아까 얘기 나눴던  열등감에 관한 건가요?"

"아니요. 다른 거예요."


사피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는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엄지손톱 아래 살이 하얗게 눌려 있는 걸 보니 손 끝에 꽤나 힘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우물쭈물 거리는 사피의 입술 입에 넣은 곡물의 껍질을 뱉으려 하는 햄스터 같았다.

"좋,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어요. 실은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같이 마시자고 한 거요."

마침내 껍질을 뱉어낸 사피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 사피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어머, 저는 들을 준비 됐어요. 어서 말해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