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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25. 2024

꽃고비의 꽃말

[잡담술집] 25화

그녀는 코트를 털며 일어섰다.

"이제 다시 움직여 볼까요?"

안내를 따라 10분 정도 더 걸었을 때 그녀가 말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수가 발에 닿을 것처럼 육지와의 경계가 없는 곳이었다.

"호수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놀라워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건물 없는 하늘과 나무들만이 반사돼요. 마치 때 타지 않은 작은 바다를 보는 것만 같죠."

그는 호수 앞으로 쭈그리고 앉아 상체를 숙였다.

"정말이네요."

새벽, 그의 눈에 비친 호수는 빛과 어둠을 동시에 품으며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개념을 섞어 아득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쁘긴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여기는 말 그대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아무런 안전장치가 없거든요. 인적도 없어 호수에 빠지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어요."

"설마 저를 여기 까기 데려온 이유가…"

"어두운 새벽, 아무도 없는 장소, 혹시 이제야 눈치챈 건 아니죠?"

그는 놀라는 척 입을 벌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해론을 너무 믿었네요. 오늘이 인생 마지막 날이 될 줄이야..."

그녀는 그에게 손을 건네며 웃었다.

"하하, 농담이에요. 그렇지만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 제 손을 잡아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확실히 그녀의 살결이 느껴졌다. 보습제를 틈틈이 발라서일까 부드럽고 촉촉했다.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평평하고 넓은 바위에 앉은 그녀의 옆으로 그도 따라 앉았다. 엉덩이가 적당히 시려 화한 느낌이 들었다.

"저렴한 마트가 있다고 해서 핸드폰 지도를 보며 찾아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인터넷 수신이 끊긴 거예요. 길치인 데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대로 길을 잃어버렸죠."

도도한 외모와 반대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니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녀는 자신의 얘기에 빠져 볼이 불룩해진 그의 얼굴을 보진 못한 듯했다.

"렇게  어두워져 택시를 잡으려 하는데 골목 사이로 삐져나온 보라색 꽃이 보였어요. 노란색 수술에 진보라색 꽃잎이 가득한 꽃이었죠. 평소였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도 처음 본 꽃이 신기했는지 그대로 죽 걸어 들어어요. 그렇게 이 길을 발견하게 된 거요."

"꽃고비라는 꽃을 본 거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심심할 때 가끔 찾아보거든요. 꽃고비는 외형이 이쁘기고 하고 꽃말이 인지 마음에 들어 기억해 두고 있었어요."

"꽃말이 뭔데요?"


그녀는 자신 앞으로 꽃고비와 비슷하게 생긴 꽃 잎사귀를 만졌다. 작은 돌들 사이에 핀 꽃잎은 얇은 모시 종이에 물을 뿌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한 번의 숨을 보내고 말했다.

"와 주세요"

그녀는 만지던 꽃잎을 조심스레 놓았다.

"골목에서 핀 꽃고비는 저에게 와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랬던 걸지도 모르죠."

"슬픈 꽃말이네요. 어떠한 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같잖아요."

"그런가요? 저는 좀 다르게 해석했어요. '힘들고 지친 당신의 마음을 나는 다 알아요. 당신의 말을 다 들어줄 수 있어요. 그러니 저를 찾으러 와주세요.' 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군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게 신기하네요."


그도 그녀를 따라 상체를 뒤로 젖혔다. 함께 당겨진 엉덩이 살 아래로 바위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상체를 앞으로 세우고 바위 두드렸다.

"그나저나 이곳 정말 마음에 드네요. 의자를 대신할 커다란 바위도 있고요."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압도되는 호수의 고요함을 내쉬는 숨에 실어 보냈다.  

"해론이 길을 잃지 않다면 이 장소를 알 수 없었겠어요."

"가끔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경로 이탈해야 하나 봐요."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 지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해 봐야겠어요."

그녀 상체를 앞으로 세우고 그의 눈을 반듯하게 바라보았다.

"피드윌도 좋은 곳을 알게 되면 꼭 저에게 알려줘야 해요."

그는 윗니를 들어낼 정도로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이제 돌아갈까요?"

그들이 다시 풀밭을 걷기 시작했을 때 어디선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왔다.

"피드윌, 여기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자세를 낮추며 노란색 꽃 무더기를 가리켰다.  

"저기 하얀색 보이나요?"

 나비 같기도 한 무언가는 조금씩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때 그녀는 그의 팔을 아래로 당기고는 작게 속삭였다.

"도망갈지 몰라요. 잠시만요."

그녀는 앞에 있던 기다란 풀을 양쪽으로 포개 열었다. 그러자 하얀색, 검은색, 갈색이 고루 섞인 삼색고양이 품에 세 마리의 아기고양이가 보였다.

"해론보다 먼저 이곳을 찾은 이 고양이였군요."

"러게요. 여기가 고양이 집이었나 봐요."


어디선가 조용히 등장한 검은 고양이 삼색고양이이마를 정성 스래 핥았다. 아무래도 아기고양이의 아빠인 듯했다. 눈을 꼭 감고 남편의 사랑을 느끼는 삼색고양이는 나른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는 입술에 검지대며 말했다.

"들키기 전에 얼른 나가요."

그들은 꼽추처럼 허리를 숙이고 발소리를 죽여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는 한동안 숙여 뻣뻣해진 허리를 피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가족이네요."

그녀도 그를 따라 기지개를 켰다. 그의 말에 동의하려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이 마주친 그들 사이로 새벽의 적막이 흘렀다. 그녀는 습관처럼 서둘러 공백을 매울 어떠한 말을 찾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굳이 말을 억지로 꺼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정체되어 있는 공기 탓인지 적막의 흐름도 정체된 것 같은 기분,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들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고 숨을 쉬고 폐로 들어오는 숨결을 느꼈다. 계속 같은 원을 그리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시계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 단지 매일 다르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을 구름만이 그들 앞에 존재할 뿐이었다. 

"양이 가족을 보는 내내 부러웠어요. 보금자리도 따뜻해 보였고요. "

"맞아요. 사실 집이 있다는 게 제일 부러웠어요. 저는 전세거든요."

"하하, 저는 아닐까 봐요?"

아무런 소음 없던 길은 그들의 목소리로 채워져 갔다. 이어폰을 끼고 전화하듯 서로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적막도 그들의 이야기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게 옆 편의점에 들어섰다. 점원이 눈을 말똥 하게 뜨고 큰 목소리로 인사하는 걸 보니 CCTV를 보고 있던 사장에게 경고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비어있는 선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아몬드가 다 팔렸나 봐요."

그때 그의 눈에 매대 아래쪽에 걸려 있는 핑크색 포장지가 들어왔다.

"땅콩은 어때요? 아몬드만큼이나 술과 잘 어울릴 거예요."

핑크색 포장지에는 크게 'Delicious and Sweet'이라고 적혀 있었다.

"좋아요. 젝스 것도 사가요."


편의점을 나오니 잔잔했던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녀의 눈으로 느릅나무 아래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남자가 들어왔다.   

"어, 저분은 아까 피드윌과 술 드셨던 분 아닌가요?"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나이 든 벤치를 쳐다보았다.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있는 이월이 궁상맞게 앉아있었다.

"해론, 먼저 들어갈래요?"

"럼요. 이거 줄게요."

그녀는 그에게 손난로는 건넸다. 이제껏 가장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그녀는 이월에게 눈인사를 하고 가게로 들어갔다. 그는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이월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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