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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27. 2024

짝사랑, 접어야 할까?

[잡담술집] 27화

사피는 그녀를 올려보다 이내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막상 말하려니 부끄러워요."

그녀는 잔을 들 흔들다.

"그럼 한 모금 마시고 시작할까요?"

사피는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부딪혔다. 잔에 울린 투명한 소리는 그녀들의 입술에 닿 사라졌다.

사피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떨림을 목소리에 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 남자애가 있어요."

"오, 꽤나 오래된 짝사랑이네요."

"네, 벌써 4년도 더 됐어요."

"속 말해줘요."

"어느 날  자애 선생님 심부름을 받아 방과 후에 혼자 남게 된 적이 있었어요. 저는 일 도 겸 말도 걸어볼 겸 해서 교실에 남아 이월을 기다렸죠."

"좋아한다는 사람 이월이군요."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린 이름에 사피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틈 사이로 붉어진 볼과 사방으로 흔들리는 눈동자가 귀여웠다.  

"아까 저를 부축하러 왔던 사람이에요."

"그 친구가 이걸 직접 들었어야 했는데."

"네?"

"아니에요."

사피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렇게 이월의 책상에 앉아 기다리는데 단둘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친 듯이 고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어요. 대로면 마음을 들켜버릴 것 같아 굴을 가리려 책상에 엎드렸어요. 그런데 그만 그 자리에서 잠들어버린 거예요. 언제 왔는지 모를 이월 제 턱에 흐르는 침을 보고 웃고 있었죠."


사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작게 신음했다.

"너무 창피했어요. 왜 하필 그때 잠들어서는…"

사피는 위스키로 건조해진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 친구의 심부름을 도와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어요. 그건 좋았는데 이상하게 그날 이후 이월이 저에게 선을 긋기 시작했어요. 말을 걸어봐도 형식적인 답만 올뿐 일상적인 대화조차 그는 제게 한 문장을 넘겨 말하지 않았어요. 다른 친구들과는 잘 얘기하면서 저에게만 딱딱하게 굴었죠."

사피는 땅콩을 입에 넣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래도 제가 싫어진 모양이에요.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요. 설마 침 때문은 아니겠죠?"

"쎄요, 이월에게 직접 듣지 않는 한 모르는 거예요. 당사자가 아니면 마음을 알 수 없잖아요."

"그렇지만 괜히 물어봤다가 부담을 느끼면 어떡하죠?"

"무작정 물어보라는 게 아니에요. 겁내지 말라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마음을 티 냈다가 친구 사이마저 잃게 될까 두려워요."


그녀는 사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살아보니 걱정했던 일은 대게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사피는 여전히 바닥 속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주제 안에서, 다른 화젯거리가 필요했다.  

"이월은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거예요?"

다행히 사피는 기억을 더듬기 위해 나무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무 벽은 손님들의 시간여행을 돕는 마법 판때기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후각이 민감한 편이라 사람을 냄새로 기억하곤 했어요. 눈을 감고 있어도 옆에 누가 지나가고 있는지 알 수 있."

"기한 능력이네요."

"그날은 머리가 아파 책상에 엎드리고 있었어요. 그때 누군가 걸어가는 소리와 함께 좋은 향이 코를 스쳤어요. 불에 묵혀두었다가 매일 꽉 안으며 깊숙이 숨 쉬고 싶게 만드는 충동적인 향이. 의 주인 이월이어요."


그녀는 사피에게 몸을 바짝 기대고 이어질 목소리에 집중했다.

"처음 맡아보는 향에 자꾸만 시선이 갔고 자연스 그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게 됐어요."

"기심이 좋아하는 감정까지 발전하게 된 거군요."

"맞아요. 그런데 좀처럼 그와 친해지기엔 어려움이 있어요. 지금도 그렇듯 노력하면 할수록 그 친구는 제게 거대한 벽을 . 짝사랑이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요. 정답이 될 수 없는 해설을 길게 늘어 쓰는 기분이에요."

"대한 벽이라, 예시가 있나요?"

"일단 대답이 너무 짧아요. 제 연락을 보고 답장하지 않은 적도 많고요. 친구들과 저를 대하는 온도 차도 심해요. 이월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걸지도 않아요. 어쩌다 한번 아까처럼 부축 이러 오는 정도."

사피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간 이월에게 쌓였던 서운함을 토해냈다.

"실히 어렵긴 하네요. 그렇지만 제게 상담 신청을 했다는 건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죠?"


사피는 유리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위스키가 스며든 입술은 맛있게 익은 복숭아처럼 즙이 새는 것 같았다.

"마음을 접기엔 너무 하루종일 그만을 생각하며 침대를 나뒹굴었으니까요.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거두는 모든 것이 제 마음대로 되질 않네요. 이성적으로는 포기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감정이 따라주질 않아요."

"뇌라는 작가가 쓴 시나리오에 가끔 심장이라는 방랑자가  놔야 영화가 재밌지 않겠어요?"

"그렇긴 하지만, 이건 너무 엔딩이 뻔한 영화잖아요."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면 모를까 저희는 관찰자 시점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되잖아요. 영화의 결말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그녀는 사피의 머리 쓰다듬었다.

"당장 고백하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라는 거예요. 포기는 언제 해도 늦지 않잖아요."

사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피의 머리 위로 얹은 그녀의 손 탓에 정수리를 감싼 머리이 부스스하게 올라왔다.

"맞는 말이에요. 역시 저는 이월을 포기 못 하겠어요."

그녀는 사피의 머리칼을 쓸었다. 위로 올라왔던 몇 가닥의 머리칼은 금세 아래로 곧게 펴졌다.


그녀는 창문 너머 벤치에 앉아 있는 이월과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얘기를 마쳤는지 가게로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급히 창문을 가리키며 사피에게 말했다.

"사피,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요."

사피는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다 이내 다시  그녀를 보며 개를 끄덕였다.

"해론,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용기 내서 한번 다가가볼게요. 아니 계속 다가가 볼게요. 해론의 말처럼 포기는 언제 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원할게요."

사피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가게 문고리를 잡았다. 맑게 울린 풍경은 마치 하나의 장면을 열기 위해 치는 슬레이트 같았다.




"오늘 제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그는 구겨진 점퍼를 털며 일어섰다.

"잘되길 응원할게요."

그때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다.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날씨와 시간에 따라 풍경 소리가 달라 수 있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아까 뵀었죠?"

익숙한 목소리에 이월은 문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에게 인사하는 사피가 보였다. 그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말했다. 일종의 가벼운 인사였다.

 ", 산책이라도 가시려고요?"

불과 몇 초 전, 당찼던 발걸음과는 다르게 사피는 그의 시선을 피하이미 넘겨 머리칼을 신 뒤로 넘겼다.

"아니요. 그, 그런 건 아니고 저 친구랑 할 얘기가…"

말을 확실하게 맺지 못하는 사피를 보며 그는 서둘러 옷을 여맸다.

"오늘 날이 많이 춥네요. 저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그는 이월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 볼게요."

이월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잠깐이었지만 그는 그새 달아오른 이월의 귀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경보라도 울린 모양이었다.


풍경의 울림이 채 꺼지기도 전에 한번 더 울리는 사이 사피는 이월의 옆에 앉았다. 벤치 위로 그가 남긴 온기 사피의 체온을 유지시켜 주었다.

"방금 저분, 오늘 처음 본 사람 맞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외면하고 이월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달이 어떤 모양인지, 별이 몇 개나 떠 있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너 친화력이 좋구나. 아닌 줄 알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넨 건 오늘이 처음이야. 원래는 안 그래."

사피는 초점 모를 이월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 내 눈을 보지 않네."

"뭐?"

이월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와버린 혼잣말에 사피는 손을 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와 다를 바 없이 자신도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사피는 서둘러 화재를 바꿀만한 소재를 찾았다.

"런데 저분과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한 거야? 꽤 오랫동안 얘기 하던데."

이월은 발 뒤꿈치로 바닥을 두드렸다. 하얀 신발끈은 금방이라도 풀릴 것처럼 달랑거렸다.

"별, 별거 아니야."

사피는 이월의 발을 따라 자신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가죽으로 된 낮은 굽의 구두는 끝이 허옇 있었다. 좀처럼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바라보 있는 이월은 자신과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동시에 자리에 일어설 낌새도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용기를 내보겠다고 해론에게 말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수 없었다. 늘 그랬듯 또다시 체념했다.


사피는 자리에 일어서며 이월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이만 들어가 볼게."

어떤 말을 꺼낼지 수많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던 이월은 회로를 멈추고 사피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잡아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사피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재채기를 했다.

"엣취"

급하게 나오느라 미쳐 겉옷을 챙기지 못한 탓에 콧등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월은 아무 말 없이 품에 있던 목도리를 꺼내 사피에게 건넸다. 사피는 주춤거리며 말했다.

"어차피 들어갈 거라 괜찮아."

이월은 돌아서사피의 소매를 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나간 손이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됐다. 이월은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을 전했다.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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