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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1. 2024

과거의 선택이 후회된다면

[잡담술집] 29화

"행복하다."

이월의 향이 짙게 밴 목도리는 사피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마치 그의 품 안에 파묻혀 목덜미에 코를 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가 직접 매 준 목도리는 엉성했지만 처음으로 숨결이 닿는 순간이었다.

일어서는 사피의 옷깃을 잡고 자리에 앉힌 지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사피의 혼잣말을 들은 이월이 물었다.

"요즘 행복해?"

연한 갈색 목도리를 살짝 쥐며 사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도리 안으로 반쯤 보이는 붉은 입술이 이뻐 보였다.

"좋네."

"너는 어때?"

사피의 질문에 이월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피드윌과 있을 때와는 다른 하늘이었다.

"잘 모르겠어.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 것 같아."

"그렇구나."

이월은 한 번의 숨을 참고 사피에게 말했다.

"괜찮으면 들어줄래?"


이월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사피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처음으로 마음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하니 또다시 말을 버벅거릴 것만 같았다.

사피는 마침내 이월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렘의 흥분 때문이 아니라 신체에서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들키지 않으려 급히 얼굴을 목도리로 가렸다. 그의 입술에 닿았던 면이 자신의 입술에도 닿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려 고개를 들었다. 이월은 여전히 하늘 어딘가를 보고 있었지만 언젠가 시선이 닿을 것만 같았다. 사피는 다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이월은 마음속으로 두 번 정도 심호흡을 했다. 좋아하는 이성이 아닌 좋아하는 사람의 내면과 대화하는 것, 이월은 젝스의 조언을 되뇌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떨리는 마음이 조금은 잠재워지는 듯했다. 역시 그들에게 상담받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후회해 본 적 있어?"

이월과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피는 소리 없이 웃었다.

"없을 리가."

사피는 얼굴을 여전히 달 언저리에 둔 채 눈동자 만을 틀어 이월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이월의 입가로 뿌연 구름이 나오고 있었다. 그가 만든 구름을 솜사탕처럼 녹여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리향을 덮은 자두 맛이 날 것 같았다. 자꾸만 변태스러워지는 모습에 사피는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월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내가 전공을 잘 선택한 건지 모르겠어. 지금 하고 있는 공부에 만족하긴 하지만 그때 다른 전공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가끔 후회하게 돼."

사피는 가만히 앉아 그의 말을 들었다.

"많은 고민을 하고 내린 결정인데도 과연 최고의 선택이었는지 종종 의문이 들어. 그 밖에도 과거의 결정들이 후회될 때가 많아."

이월은 지나쳐만 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솜을 뭉쳐놓은 것처럼 엉켜 있는 구름은 달을 가렸다 내보이기를 반복하며 알 수 없는 동선을 그리고 있었다.

"좀 더 성숙해졌을 때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피는 포갰던 다리를 앞으로 쭉 피며 말했다.

"후회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후회가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게 되기도 하지."

사피는 목도리를 쥐던 손으로 허벅지를 짚어 상체를 숙였다.  

"그런데 후회는 어쩌면, 그저 한 면 밖에 살아보지 못한 아쉬움은 아닐까?"

이월은 고개 숙인 사피를 바라보았다. 아래를 향한 사피의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꽤나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사피는 작은 입술을 다시 움직였다.  

"우리는 살면서 두 면을 동시에 경험할 수 없어. 아쉽게도 신은 우리에게 언제나 한 가지만을 선택하게 하니까."


사피의 시선에 누군가 떨어뜨린 사탕조각을 힘 있게 들고 있는 개미가 보였다.

"생각해 보면 모든 면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후회를 할 수 있는 건지도 몰라. 다른 면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는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만을 그릴뿐이잖아."

마침내 사탕조각을 들어 올린 개미는 자신의 옆으로 과자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네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때보다 성숙해졌어.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

사탕조각을 내려놓은 개미는 둘 중 무엇이 더 좋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래도 그 선택은 어렸던 네가 머리를 꽁꽁 싸매며 내린 최선의 선택 아니었을까? 수고한 과거의 너를 존중한다면 네가 내린 선택들도 존중해야 하는 것 같아. "

"그렇구나."

"나는 후회가 많았어서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의 많은 선택들은 어렸던 내가 나를 위해 노력한 결과였더라고. 최고의 선택은 아니지만 최선의 노력이었던 거지. 그래서 지금은 그냥 과거의 선택들을 믿기로 했어. 그때의 나를 존중한다면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결정을 내렸는지 개미는 다시 사탕조각을 등에 지고 자리를 떠났다.

"그래도 후회된다면 지금 바꾸면 되는 것 같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을 통해 얻은 것들을 생각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거고."


"듣고 보니, 나는 용기 없는 현재를 탓하기 싫어 과거의 나에게 책임을 넘겨버린 것 같아. 그래야 속이 편하니까."

이월은 짧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과거의 나에게 미안해지네. 열심히 노력해 줬는데 이제와서는 책임전가나 하고 말이야."

사피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 이월의 눈과 마주쳤다. 자신을 죽 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다시 긴장되는 것 같았다. 사피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미, 미안. 답변이 너무 진지했지?"

"아니야. 도움이 많이 됐어."

이월은 여전히 사피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덕분에 생각이 정리된 것 같아."

"다행이다."


이월은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두꺼운 구름이 달을 가리고 있었다.

"이렇게 둘이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네."

사피도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도화지에 파란 물감을 쏟고 그 위로 하얀 잉크를 뿌린 것 같았다.

"그러게. 이제 고민은 없는 거야?"

"아직 한 개 남아있긴 하지만, 이건 너에게 말 못 하는 거라서."

"어쩔 수 없지. 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그 고민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길 바랄게."

"고마워."


이월과 자신이 한마디 이상의 대화를 나눈 것은 3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사피는 흥분되면서도 혹여 실수한 말은 없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단어는 적절했는지, 말의 두서는 괜찮았는지 생각하며 여전히 달을 가리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너는 고민 없어?"

이월의 물음에 사피는 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물론 있지. 하지만 나도 너에게 말할 수 없는 거야."

"그렇구나."

사피는 발을 멈추고 이월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진 그늘 아래 이월의 얼굴은 달빛을 조명 삼아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짙은 눈썹과 볼에 난 흉터, 그리고 활의 단장 같은 턱선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만히 얼굴을 보다가 이유 모를 끌림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열린 입술 그대로 사피는 말했다.

"나, 그 고민을 지금 해결해 보려고."

시선을 느낀 이월은 고개를 내려 사피를 바라보았다. 왜 인지 지금 만큼은 눈을 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동자의 떨림이 느껴졌지만 마침 드리운 구름의 그림자가 가려줄 거라 믿으며 사피의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월-."

사피의 목소리에도 떨림이 있었다.

"응?"

"혹, 혹시 이번주 토요일에 뭐 해?"

물음과 동시에 사피는 시선을 내리고 목도리 끝자락을 세게 쥐었다.

"아직 일정은 없는데, 왜?"

사피는 다시 이월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시간 괜찮으면 그날- 나랑 만날래?"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버린 사피와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튼 이월.


이월은 사피의 갑작스러운 데이트 신청에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심장이 가운데서부터 요동치지 시작했다. 사피의 눈을 더 이상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사피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어 용기 내 다시 고개를 틀었다. 어중간하게 목도리에 낀 머리칼은 위로 붕 떠있었고, 붉어진 콧등 아래로 콧물이 맺혀 있었고, 바람 탓에 눈이 시렸는지 속눈썹은 젖어있었고, 오물거리는 입술에는 가는 숨줄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월은 사피의 입술을 깨물며 그녀의 품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간신히 자제했다.


이월은 몇 번의 숨을 보내고서 물었다.

"그게 너의 고민이었어?"

"응."

귀엽게도 사피는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있었다.

"사피, 방금 내 고민도 해결 됐어."

이월을 바라보았다. 이월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왔을 안개가 이월의 입가에 닿고 있었다. 그들은 시려운 공기와 대비되는 분위기를 통해 서로의 감정이 우정 이상의 무언가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 머문 공기는 결코 감기 들게 하지 않을 데워진 대기일 뿐이었다. 사피는 입을 가리고 말했다.

"우리 같은 고민이었구나."

더 이상 눈을 피하지 않는 이월은 천천히 자신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날은 사피의 이야기를 들려줘."

사피는 여전히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은 내가 용기 내어 볼게."

구름에서 완전히 해방된 달이 그들의 붉어진 귀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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