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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2. 2024

나는 정말 연애하고 싶은 걸까?

[잡담술집] 30화

태이는 서랍을 열어 보이며 말했다.

"점장님, 안주가 부족할 것 같은데 급한 대로 밖에서 사 올까요?"

젝스는 앞치마에 마른 손을 털었다.

"안주는 안쪽 창고에 더 있어서 괜찮아요. 일단 좀 쉬어요."

태이는 나무 벽에 상체를 기대고 숨을 돌렸다.

"단체손님이 드디어 나갔네요."

"한가하다가도 갑자기 들이닥치니 예상할 수가 없어요."

젝스는 젖어 있는 태이의 이마를 보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어요. 첫날부터 힘들었죠?"

"아니에요. 오랜만에 땀 빼서 기분 좋았어요."

"술은 마셔요?

"당연히요."


젝스는 자신이 마셨던 위스키병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마실래요?"

"좋죠. 그런데 일하는 중에 마셔도 되나요?"

이미 뚜껑을 열고 있는 젝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수납장을 열어 잔을 찾는 젝스의 뒤로 태이가 말했다.

"저도 플라스틱 잔에 주시겠어요? 점장님과 같은 잔에 마시고 싶어서요."

젝스는 자신의 잔을 가리키며 물었다.

"술이 든걸 어떻게 아셨어요?"

"마시는 걸 봤어요. 개운하게 털어 넘기는 걸 보고 분명 물은 아닐 거라 예상했죠."

"하하, 관찰력이 좋군요. 그럼 같은 잔에 드릴게요."

젝스는 태이의 젖었던 이마가 생각나 제빙기 뚜껑을 열었다.

"시원하게, 맞죠?"

"완전히요. 감사합니다."

"참, 호칭은 브라운이라고 불러줘요. 점장님은 너무 딱딱하잖아요."

"하하, 알겠어요."


태이는 잔을 받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순식간에 들어온 많은 양의 술은 식도를 뜨겁게 만들었지만 이내 흡수되어 긴장감을 완화시켜 주었다. 삐걱거리는 신체에 윤활제를 뿌린 것만 같았다.

"역시 일할 때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젝스는 구석에 있던 간이의자를 건넸다.

"여기에 앉으세요."

"고마워요. 브라운 의자는요?"

"제 건 여기에 늘 구비되어 있답니다."

젝스는 작업테이블 아래로 접혀있는 아이보리색 간이 의자를 피고 앉았다.


그들은 대화가 한창인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색의 공기를 만들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태이는 주황 전구에 발각된 먼지 한 톨이 사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사람들이 왜 여기를 찾는지 알겠어요."

태이는 오래된 나무 향을 맡으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위스키로 데워졌던 식도가 다시 제 온도로 낮춰지는 듯했다.

"나이 든 가구들을 보니 저도 그들의 시간을 함께 걸어온 기분이에요. 모든 것이 이곳의 품 속에서 허용될 것만 같아요."

태이는 오른손으로 플라스틱 잔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이 가게만이 주는 포근함이 있어요."

"칭찬 고마워요. 누군가 알아준 것 같아 기분 좋네요."


젝스는 경직된 허리를 손으로 누르며 기지개를 켰다.

"그건 그렇고 덕분에 살았네요. 설마 새벽 4시에 면접 보러 오실 줄은 몰랐지만요."

어느덧 나이 든 나무시계의 시침은 IV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일도 하고 있어서요. 시간이 지금 밖에 나질 않았어요."

"열심히 사시네요."

근육이 늘어질 새 없이 시간을 쪼개 일한 태이의 몸은 균형 잡혀 있었다. 마른 체격인데도 유니폼이 잘 어울렸던 이유였다. 태이는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뭐, 해야 하니까 하는 거죠."


태이 앞으로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한 채 온기를 나누는 연인의 모습이 보였다. 태이는 가만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돈 버느라 바쁘긴 하지만 연애는 하고 싶네요."

젝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연애 좋죠. 하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태이는 턱을 짚으며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글쎄요, 조금 막연한 이유긴 한데 다들 연애를 하니까요. 처음엔 딱히 연애에 관심이 없었는데 지인들의 연애 소식을 듣다 보니 저도 모르게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제 눈앞에 있는 연인만 봐도 저들처럼 살아야 할 것만 같거든요."


젝스는 LP플레이어 옆으로 핑크색 포장지를 발견했다. 포장지 위로 '맛있게 먹어요'라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피드윌과 해론이 사다 놓은 듯했다. 젝스는 포장지를 뜯고 태이 앞에 두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산건 아니지만요."

태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주를 입에 넣었다. 바삭하게 튀겨진 얇은 밀가루 반죽과 약간의 설탕맛이 느껴지는 땅콩은 상당히 맛이 좋았다.

젝스는 안주를 집으며 말했다.

"음, 연애는 부가적인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죠. 모두가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SNS 속 모든 사람들은 연애를 하잖아요. 그들처럼 살아야 저도 행복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삶의 필수 요소 같기도 하고요."

젝스는 목이 텁텁했는지 위스키로 목을 축였다. 잔을 내려놓고 태이에게 물었다.

"애초에 연애는 하고 싶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저 그들이 하니까-“

태이는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의식과 결정, 그리고 생각들이 모두 타인의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하고자 하는 욕구조차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왜 연애를 하고 싶었던 거지? 나는 왜 그들처럼 살아야 했던 거지? 순간 몰려오는 생각 뭉텅이에 인중을 찌푸렸다.


태이가 눈을 뜨자 젝스는 오른손으로 턱수염을 쓸며 말했다.

"저는 식욕이 강해서 음식에 관한 SNS를 많이 봤어요. 그중 유독 많이 노출되는 음식이 있었고 저도 모르게 그걸 먹고 싶어 했죠. 원래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분명 그걸 먹고 싶지 않았는데, 먹을 생각도 없었는데 무의식으로 원하게 된 거였어요. 마치 세뇌당한 것처럼요."

그새 길어진 젝스의 턱수염은 구레나룻과 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SNS를 지웠어요. 자의적으로 원하는 걸 찾기 위해서요."

젝스는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SNS를 지우라는 게 아니에요. 단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타인의 소식과 자신의 삶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게 연애든 무엇이든 간에요. “

젝스는 땅콩을 위로 던져 받아먹었다. 사육사가 던진 물고기를 정확히 낚아채는 물개 같았다.

"태이만의 방법이 있을 거예요. 잘 생각해 봐요."

"고마워요."


젝스는 검지와 중지를 입술에 갖다 대며 물었다.

"담배 해요?"

"아니요."

자리에 일어서며 젝스는 작업테이블 아래를 더듬거렸다. 담배와 라이터를 찾는 모양이었다.

"잠깐 담배 좀 하고 올게요. 찬바람을 맞으며 불에 탄 연기를 마시는 게 제 행복이거든요."

"하하, 천천히 다녀오세요."


풍경이 울리고 태이는 가만히 앉아 LP플레이어 옆에 있는 나무 상자를 바라보았다. 틈틈이 박혀있는 타원형의 무늬는 나이테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태이는 마른 입술을 만지며 작게 중얼거렸다.

"타인으로부터 독립하는 방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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