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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3. 2024

직업을 그만둬야 할까?

[잡담술집] 31화

예측할 수 없는 결을 따라 달려오는 바람에 라이터 불이 자꾸만 꺼졌지만 젝스는 인내심을 갖고 곧 얻게 될 작은 행복을 위해 점화버튼을 연신 눌러댔다. 그러나 피어오른 불은 바람에 죽기를 반복했다.

"화력이 너무 약한 거 아니에요?"

젝스의 옆으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젝스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보라색 쉐도우 위로 길게 그려진 아이라인은 그녀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진파란색의 청바지는 가는 허리부터 두꺼운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곡선을 부각했다.

"불 빌려드릴까요?"

"좋죠."


그녀는 몸을 젝스에게 가까이 대고 라이터 뚜껑을 튕겨 열었다. 빨간색으로 코팅된 플라스마 아크 라이터가 '팅'하는 소리를 내며 불을 피웠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긴 머리칼이 젝스의 어깨에 닿았을 때, 어두운 하늘은 그녀의 빨간 머리칼을 검붉게 만들었다. 그녀의 라이터는 젝스가 물고 있는 담배 권련지를 단번에 태웠다. 젝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코를 적시고 따뜻한 연기가 폐를 데웠다.

"고마워요."

그녀도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부푼 가슴을 더 크게 만들고 이내 다시 숨을 내쉬었다.

"역시, 겨울에 피는 담배는 맛이 다르네요."

"뭘 좀 아시는군요."


젝스는 굳은 길을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새벽에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눈 아래 살을 밑으로 내렸다.

"힘든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답니다. 내일이 쉬는 날이라 망정이지 정말 죽을 뻔했어요."

그녀는 담배연기를 입에 물고 한숨 쉬듯 내뿜었다.

"이제 때려치울 때가 된 것 같아요."

"새벽야근은 심하긴 하네요."

"그쪽은 지금까지 술을 마신 건가요?"

그녀는 젝스의 명찰과 뒤로 보이는 가게를 번갈아 보며 손을 포갰다.

"아, 여기서 일하시는군요."

젝스는 고개를 들고 턱수염을 만졌다.

"네. 이래 봐도 점장이랍니다."

진갈색 셔츠를 다려 입은 젝스는 양복 모델이라도 된 것처럼 다리를 사선으로 뻗어 보였다.

"하하, 멋지네요."

있지도 않은 모자를 벗으며 젝스는 고개를 까딱였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어느새 모두 타버린 담뱃잎을 휴대용 재떨이에 지지며 벤치에 앉았다. 옆으로 보이는 느릅나무는 꺾여 떨어질 것 같은 나뭇가지를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느릅나무를 쓸어 보았다. 연륜이 느껴졌다. 수피에 난 상처는 나무가 이뤄낸 성장의 훈장이 되어 그간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젝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은 만족하시나요?"

모두 타버린 젝스의 담배를 보며 그녀는 휴대용 재떨이를 건넸다.

"고마워요."

젝스는 휴대용 재떨이를 다시 돌려주며 대답했다.

"일에 만족하고 있죠. 예전부터 꿈꿔왔던 일이니까요."


가죽재킷의 지퍼를 올리던 그녀는 외투 안에 입은 니트가 지퍼에 집혔는지 아래로 내리고 다시 위로 올렸다. 이번에는 매끄럽게 그녀의 목까지 지퍼가 올라갔다.

젝스는 그녀의 왼쪽에 앉으며 물었다.

"그쪽은요?"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탄 연기가 아닌 맑은 안개가 그녀에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오늘과 같이 야근이 잦아서 그런가요?"

그녀는 다리를 쭉 뻗고 허리를 뒤로 젖혔다. 몸을 조금 더 뒤로 기울이자 건물 없는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느릅나무의 가지들과 달을 반쯤 가린 구름, 행성인지 모를 별,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안개가 보였다. 그녀는 팔이 저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거와는 별개예요. 그냥 지금 일이 저에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안 되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려운 문제네요. 직업은 특히 고민되는 것 같아요. 수면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일하는 데 쓰니까요."

"그렇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애초에 일을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 이긴 하지만 학생 때는 대학교가, 대학생 때는 취업이 목표였는데 모든 걸 달성한 지금은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어두운 하늘을 뚫고 지나가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비행기가 멋있어 보였다. 자신도 날개를 피고 항해하고 있지만 경로 없이 이리저리 방황한다는 점에서 비행기가 아닌, 그저 일개의 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만 있으면 나도 비행기가 될 수 있을 텐데'

넓은 하늘을 보려 그녀는 다시 몸을 뒤로 젖혔다. 그녀의 체중을 받치고 있던 팔이 또 한 번 저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예 팔을 벌려 뒤로 완전히 누워버렸다. 이젠 몸의 어떤 부위도 저리지 않았다. 이내 열린 하늘이라는 스크린은 그녀에게 가장 깊은 영화를 상영했다.


젝스의 눈에 천천히 날아다니는 파리가 보였다. 뭐가 그리 궁금한지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퉁이에 핀 노란 꽃이 마음에 들었는지 꽃잎에 앉아 이파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파인 도로에 생긴 웅덩이에 얼굴을 비비기도 했다. 파리의 표정을 알 순 없었지만 행복해 보였다.


젝스는 파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목표가 있어야 하나요?"

"인생에 경로가 없으면 방황만 하게 되잖아요."

파리는 노란 꽃의 여운을 잊지 못했는지 다시 꽃 이파리로 돌아가 위로 앉았다.

"경로를 이탈하면 길이 없는 건가요? 새로운 길이 열릴 뿐이죠."

다시 날개를 핀 파리는 그의 시각에서 벗어나 어디론가로 날아가버렸다. 젝스는 남겨진 노란 꽃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방황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숨어있던 길을 알려주거나 몰랐던 자신의 면을 발견하게 해 주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렇지만 방황이 길어질수록 점차 지쳐가는 것 같아요."

젝스는 누워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벤치 위로 펼쳐진 그녀의 붉은색 머리칼은 껍질채 숙성된 포도 같았다. 곱고 짙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음, 지금 직업은 어떻게 선택하게 된 거예요?"

"전공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즐겁지도 않고 성취감도 없어요. 쌓여가는 스트레스는 제가 스스로 만든 것 같기도 해요."


젝스는 그녀가 보고 있을 하늘은 어떤 모양일까, 하고 고개를 더 높이 들어 올렸다. 그녀는 벤치를 손으로 두드리며 젝스에게 말했다.

"누워봐요."

젝스는 잠시 고민하다 그녀의 말대로 몸을 뒤로 완전히 젖혔다.

"어때요?"

"우와-"

앉아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전경이 펼쳐졌다. 육지 없는 깊은 바다에 몸을 담가 하늘과의 경계를 허문 것 같았다. 하늘에 박혀있는 별은 언제라도 떨어져 바다를 가득 매울 것처럼 아슬하게 걸려있었다.

"정말 좋아요.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만큼이요."

"다행이네요."


젝스는 하늘로 떠오른 또 다른 비행기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생각해 둔 다른 직업은 있나요?"

그녀는 팔을 들어 천천히 움직이는 비행기를 손가락으로 짚고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생각해 둔 직업은 없지만 좋아하는 건 있어요. 그림이요. 이쪽으로 취업하면 그나마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질까 싶기도 해요. 연봉은 적어지겠지만요."


그녀의 미간은 좁혀져 있었다. 피부가 하얀 터라 어둑한 하늘에서도 주름이 잘 보였다. 비행기를 쫓는데 꽤나 열중인 듯했다.

"돈을 버는 이유는요?"

그녀는 들어 올렸던 팔을 벤치로 내리고 한숨 쉬었다.

"글쎄요.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위해서 인 것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걸로 돈을 벌건지, 돈을 벌어서 좋아하는 것에 투자할 건지 정하는 건 어때요? 그러면 답이 보일지도 몰라요."

", 어쩌면 그 경계가 모호해 이렇게 혼동이 온 걸 수도 있겠네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젝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있었다.

"젝스는 좋아하는 걸로 직업을 선택한 거죠?"

"아니요. 물론 이 직업도 좋아하지만 지구과학 공부하는걸 더 좋아해요. 지금도 지구과학에 관련된 책과 강의를 보며 공부하고 있거든요."

"오, 멋지네요."


그들은 다시 하늘로 고개를 돌려 화면을 전환했다. 젝스는 눈을 감고 흘러가는 바람을 맞았다. 물 위로 떠다니는 듯한 출렁거림이 느껴졌다.

"예전부터 저만의 술집을 차리는 게 꿈이긴 했지만 그건 제게 돈 버는 수단에 불과해요. 저는 재능을 이용해 최대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 거고 그 돈으로 공부라는 취미에 투자하고 있는 거죠."

"그렇군요. 저도 어떤 것에 의미를 둘지 정해야겠어요."

"도움이 좀 됐나요?"

"그럼요.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젝스는 몸을 틀어 가게를 들여다보았다. 태이는 여전히 간이의자에 앉은 채 홀로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 혼자 있어 심심한 건지, 여유로운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말동무는 필요해 보였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점장인데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서요."

그녀는 벤치에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며 물었다.

"괜찮다면 저도 들어가도 되나요?"

"좋죠. 마침 한가할 때에요."

그녀는 정돈된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겼다.

"지금처럼 말동무도 해주실 건가요?"

"원하신다면요."

젝스는 웃으며 그녀의 가죽 가방을 들었다.

"참, 말동무는 저 말고 한 명 더 있답니다."

문을 열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럼 들어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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