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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4. 2024

나를 사랑하는 방법

[잡담술집] 32화

가게를 떠도는 따뜻한 온기는 그녀에게 묻은 차가운 먼지를 털어주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스탠드는 영화를 상영하듯 좌석에 앉은 사람들을 모두 다른 분위기로 연출하고 있었다.

젝스는 태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녀왔어요."

"좋은 시간이었나 봐요. 얼굴이 아까보다 밝아졌어요."

"오랜만에 하늘을 봐서 그런가 봐요."

젝스는 뒤이어 들어오는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방금 만난 사람이에요. 이름이..."

"안녕하세요. 크린이라고 해요."

크린은 가슴에 손을 얹고 인사했다. 태이도 일어나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저는 태이예요. 보시다시피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젝스는 왼쪽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명찰을 보였다.

"하하, 저도 보시다시피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젝스는 작업 테이블 앞 좌석 의자를 당기며 손짓했다.

"크린, 이쪽에 앉아요."

"고마워요."

크린은 겉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검은색 가죽재킷 안의 노란색 목폴라는 지퍼에 끼었던 탓에 올이 하나 축 늘어나 있었다. 젝스는 작업 테이블로 돌아와 담배와 라이터를 서랍 틈에 끼워 넣었다. 화력이 약한 라이터는 버릴까 했지만,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언젠가 담배를 태우려 불을 피울 때, 그렇게 불어오는 바람에 또다시 불이 꺼졌을 때, 어디선가 크린이 나타나 불을 켜주진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으며.


"메뉴판 있나요?"

"잠시만요."

크린은 건네받은 메뉴판을 둘러보았다. 검은색 두꺼운 종이판 위로 다양한 종류의 술이 적혀 있었다. 작업 테이블 옆 연필꽂이에 있는 하얀색 펜으로 쓴 듯했다. 메뉴판 끄트머리에 비집다시피 적혀 있는 술은 가장 최근에 추가된 것 같았다. 글씨체는 전반적으로 삐딱한 편이었는데 그중 특히 엉성하게 적혀 있는 술이 있었다.

"이걸로 주시겠어요?"

"준비해 드릴게요."

젝스는 몸을 돌려 수납장을 열었다.

"어디 보자-"

허리를 굽이고 수납장 첫 번째 진열대부터 마지막 진열대까지 훑어보았다. 두 번 정도 훑었을 때 젝스는 잔을 하나 들고 손가락으로 겉면을 튕겨냈다. 크린의 목소리처럼 높고 맑은 소리가 났다.

"이게 좋겠다."


투명색 유리잔 위로 보라색과 노란색이 부분적으로 거칠게 채색되어 있는 잔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얇아 보였다. 술을 마시려 잔에 입술을 갖다 대면 면도날에 스친 것처럼 피가 맺어버릴 것만 같았다.

젝스는 잔을 채우고 크린에게 건넸다.

"당신의 쉼이 되길"

"고마워요."

손으로 잔을 감싸자 피부가 유리에 투과되어 맑은 노란빛이 잔속을 채웠다. 반딧불이의 엉덩이를 보는 것 같았다. 크린은 그대로 잔을 들어 주둥이에 입술을 포갰다. 으스러질 것 같던 유리잔은 얇은 종이가 되어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체온을 그대로 교차하게 했다. 그러나 자칫 이에 닿으면 정말 부서질 것만 같아 입술로만 술을 받았다. 꼭 아사하기 직전 발견한 탐스러운 나무의 진액을 음미하는 것 같았다.

태이는 남은 과자를 모두 그릇에 덜어 크린에게 건넸다. 파삭하게 씹히는 식감의 과자에는 옥수수가루가 묻어 있었다.


흘러들어 간 위스키는 도로에 새겨진 브레이크 자국처럼 식도를 뜨겁게 만들었다. 크린은 미쳐 넘겨지지 않은 알코올 때문에 순간 눈물이 났지만 화장을 정리하는 척 닦아냈다. 크린은 술을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젝스와 태이가 풍기는 분위기에 자신도 들어가고 싶었다.

"맛이 좋네요."

젝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크린을 보곤 고다치즈 2조각을 건넸다. 고다치즈는 포일 포장지로 감싸져 있었다.

"치즈와 같이 먹으면 풍미가 더 좋을 거예요."

"고마워요."


젝스는 간이 의자에 앉으며 태이에게 물었다.

"제가 없는 동안 난처한 일은 없었나요?"

태이도 그를 따라 앉으며 대답했다.

"다행히도 없었어요."

태이의 잔은 어느새 절반가량 비어있었다.

"오, 그새 많이 드셨네요."

"목 넘김이 좋더라고요."

크린은 유리잔 베이스를 만지며 그들의 플라스틱 잔을 바라보았다.

"술 마시면서 일하는군요."

태이는 잔에서 손을 떼며 웃어 보였다.

"하하, 저에게 뭐라 하지 마세요. 브라운에게 배운 거예요."

크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뭐라 하는 게 아니라 같이 취할 수 있어 좋다고요."

"호오-"

젝스는 잔을 들었다. 초록색 플라스틱 잔 안의 위스키는 작은 파도가 일렁이듯 휘청거렸다.

"그럼 같이 취해 볼까요?"




젝스는 쌀 과자를 집으며 태이에게 물었다.

"참, 좀 전에 저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태이는 고개를 기울이며 턱을 만졌다. 아무래도 취기가 생긴 탓인지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음- 자주적인 삶, 그리고 연애 관련한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아, 그랬었죠."

태이도 안주를 집어 입에 넣었다. 파삭한 과자는 부드럽게 녹았고, 혀에 남은 옥수수가루는 까끌거려 씹는 맛이 좋았다. 손님이 안주를 계속 요청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종류가 다양한 안주는 모두 감칠맛이 좋아 위스키와 어울렸던 것이다. 잔을 고르는 능력과 적절한 안주를 찾는 젝스의 능력에 감탄했다.


태이는 손가락에 묻은 옥수수가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브라운은 연애하고 있나요?"

"아니요. 놀랍게도 한 번도 없답니다."

젝스는 어깨를 피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잘생겼는데도 말이죠."

다리를 포개 앉은 크린은 안쪽 허벅지로 손을 넣으며 물었다.

"이유가 있나요?"

젝스는 입술에 묻은 부스러기를 혀로 핥으며 대답했다.

"딱히 연애할 마음이 없어서요. 지금처럼 사는 게 좋기도 하고요."

과자를 하나 더 집으며 젝스는 크린을 바라보았다.

"크린은요?"

"저도 아직이요. 사랑을 나눌 상대를 만나지 못했어요."

“오, 그럼 저처럼 한 번도 연애해 본 적이 없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헤어진 지는 꽤 됐어요. 벌써 3년도 더 됐네요."


태이는 상체를 숙여 작업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얹었다.

"다들 멋지네요. 요즘엔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해 연애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허벅지에 깔려있던 오른손이 저렸는지 크린은 손을 꺼내 주물렀다. 감각이 다시 돌아왔을 즘 유리잔 안에 담겨있는 위스키를 바라보았다. 독했지만, 목을 강하게 태웠지만, 다시 강렬함을 느끼고 싶었다. 크린은 잔을 들어 쓰린 술을 넘기고 치즈를 입에 넣었다. 그러곤 남은 한 개의 치즈큐빅을 만지며 말했다.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해 하는 연애, 그건 결국 자신을 잃게 하는 연애 같아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그들은 가만히 크린의 시선을 따라 빛이 나지 않는 반딧불이 엉덩이를 바라보았다. 젝스는 흘러나오는 LP소리에 호흡을 맡 크린에게 물었다.

"들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크린은 깊은숨을 내쉬며 그동안의 기억을 정리했다. 포일 안의 치즈가 물렁해진지도 모른 채 치즈를 계속 조물 거리고 있었다. 흐물 해진 치즈에 아차, 하며 그녀는 웃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입을 열었다.

"말했던 것처럼 저는 한때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해 연애를 했어요.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죠. 그저 기댈만한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그렇게 저는 타인에게 기대면서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간 채 살아갔어요."

크린은 허리를 굽이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갑자기 마음속 견고했던 완성된 퍼즐이 파괴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젝스는 잔을 들어 크린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녀를 비추는 식탁등 조명은 어두운 장르를 연출할 모양이었다.

"억지로 끼워 맞췄던 퍼즐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거였죠. 모든 조각이 없어지니, 퍼즐에 가려졌던 무언가가 보였어요. 바닥에 완전히 누워있는 저였어요. 혼자서는 앉아있을 생각도, 일어설 생각도 없는 자신이었죠. 처량하고 안타까웠어요."

크린이 손으로 유리잔을 덮자 반딧불이 엉덩이는 다시 빛을 냈다. 참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결국 더 이상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이딴 연애는 그만두자고 결심했어요."

크린은 테이블 위로 작은 원을 그리며 잔을 흔들었다. 노란 물 위스키에 떠도는 주황빛은 바다 위에 얹은 개나리 이파리가 되어 잔잔히 돌아다녔다.“

"그래서 지금까지 홀로 독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남에게 기대는 게 아닌, 스스로에게 의지하기 위해서요."


젝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크린을 바라보았다.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고마워요."

태이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크린에게 물었다.

"혹시 홀로 독립하기 위해 하고 있다는 노력, 어떤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마른 코를 손으로 닦으며 덧붙였다.

"저도 홀로 독립하고 싶어서요."

"하하, 그럼요."

크린은 엉덩이를 의자 끝으로 밀고 상체를 숙여 턱을 괴었다. 작은 키 때문인지 그녀의 발은 허공에서 동동거리고 있었다.

"먼저 연애에 집착했던 이유를 생각해 봤어요.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방안을 제시할 수 있으니까요."


크린은 유리통에 있는 젤리를 하나 꺼냈다. 그녀의 손에 덜렁 놓인 젤리는 혼자 있어 외로워 보였지만, 동시에 자유로워 보였다.

"연애를 하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증명하게 되죠."

크린은 젤리를 내려놓고 차고 있던 진주목걸이를 만졌다.

"제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본인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저는 누군가의 사랑이 간절했으니까요. 그 결핍을 타인으로부터 채우려 했고 그래서 연애에 집착했던 거였어요."

크린은 잔을 들고 입을 닫았다. 그들은 크린의 말풍선 속 기억들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몇 분 정도 지나고 크린은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홀로 독립하는 방법은 본인을 사랑해야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건 좀처럼 쉽지 않았죠."

플라스틱 잔으로 투과된 빛은 테이블 위로 잔의 그림자를 내렸다. 검은 바닷속 하얀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젝스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에게는 사랑 줄 이유를 찾지만 본인에게는 사랑 주지 않을 이유만을 찾으니까요."

유리잔을 감싸 쥔 크린은 맞물린 손가락을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많은 이들에게 물어보고 적용해 봐도 소용없었어요. 결국 저만의 방법을 찾아야 했죠."

크린은 태이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태이도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할 거예요. 제 말은 참고로만 들어주세요."

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린은 다시 유리잔으로 시선을 옮기며 진주 목걸이를 만졌다. 깊은 생각에 빠지면 목걸이를 만지는 듯했다. 탁한 아이보리색 진주는 손 때를 타 바래진 걸까, 태이는 문득 궁금했지만 이어지는 크린의 말에 자세를 고쳤다.


"방법을 찾지 못한 저는, 무작정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어요. 집에 가만히 있어보기도 하고 날씨가 좋은 날엔 긴 시간 동안 걸어보기도 했죠."

크린은 모두가 그랬듯 나무벽을 바라보며 지난 자신의 모습을 회상했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크린의 눈동자를 따라 불에 댄 흉터가 생기는 것 같았다.

"괜찮아지는가 싶다가도 독백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어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본인을 볼 수가 없었어요. 여자 한 명이 홀로 앉아 엉엉 울고 있는 것 같았죠.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박이 되어 스트레스로 다가왔어요. 다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고 이만하면 충분히 노력했다고, 그만 포기해 버리자고 생각했어요."


어느덧 사라진 눈 밑의 흉터는 긴 과정을 끝내 어떤 결론에 도달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지쳐 누워있던 어느 날, 서랍 구석에 있던 초록색 파일을 발견했어요. 'Dear. 크린, From. 크린'이라고 적혀있는 파일이었죠. 제가 저에게 쓴 편지 더미였어요."

크린은 그들의 눈을 번갈아 보며 허공에 손가락으로 사각형을 그렸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가끔 자신에게 편지를 쓰곤 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23살까지, 1년에 한 번 꼴로 쓴 편지였어요. 당시 몸무게와 키를 기록하기도 했고 창피했던 일이나 뿌듯했던 성과를 적기도 했어요. 편지에서는 모두 다른 상황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제가 있었죠."


크린은 포갰던 다리의 위치를 바꾸고 말을 이었다.

"그날 저는 본인에게 쓴 편지를 모두 읽어봤어요. 첫 번째 편지를 읽었을 땐 어렸던 제 모습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고, 다섯 번째 편지를 읽었을 땐 어느새 성숙해져 버린 제 어투에 놀랐고, 그렇게 마지막 편지를 읽었을 땐 모든 편지에서 공통적으로 써져 있던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죠."

고개 숙인 크린의 입가로 작은 미소가 띠어 있었다.

"모든 편지의 마지막 줄에는 '크린, 언제나 너를 응원해'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들은 여전히 가만히 앉아 크린의 말을 들었다.

"제 뒤에는 과거의 수많은 제가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저를 응원하고 있었어요. 저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였어요. 어렸던 제가, 반항기였던 제가, 창피한 일을 겪었던 제가, 성숙해진 제가, 모든 순간의 제가 늘 저의 곁에 있었던 거였어요."


크린은 목폴라에 장식된 리본을 잡았다. 가슴 중앙에 달려있 리본은 그녀의 심장 같았다.

"자신도 몰랐던 사이에 저는 이미 저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누구보다 제가 잘되길 바랐던 제가 있었던 거였."

리본을 놓는 크린의 손을 따라 아래로 삐죽 나와있던 올이 달랑거렸다.

"그때부터 혼자 있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 혼자만으로 이미 충분해졌으니까요. 정확히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올은 꽤나 날카로운 지퍼에 상처 입었지만 끝까지 옷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수많은 나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해주기도 했고 미래의 불안을 덜어주기도 했죠. 모든 문제의 해결 방안은 이미 스스로가 알고 있던 거였어요. 이 단순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저는 그때부터 홀로 설 수 있었어요. 홀로 독립하는 방법은 홀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요."

크린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순간 지금껏 대화의 주인공이 자신이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듯했다. 크린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헛기침했다.

"물론 지금도 계속 노력하는 중이에요."


단편 영화를 보듯 누군가의 인생을 관람하게 된 태이는 자신도 본인만의 이야기를 제작해 언젠가 남들에게 상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자신처럼 방황하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크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태이를 바라보았다.

"태이만의 방법을 찾으라 말하긴 했지만, 한 번쯤은 자신에게 편지를 써봐요."

태이는 손가락을 테이블 위로 까딱거렸다. 바짝 깎여진 손톱은 테이블에 닿지 않아 살결이 나무에 스치는 소리만 났다.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 조금 어색할 것 같아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태이는 크린을 향해 잔을 들었다.

"해볼게요.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크린."

"별말씀을요."


혀로 입술을 쓸었을 때 입가로 옥수수가루가 느껴졌다. 한참 전에 먹었을 과자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가루를 묻힌 채 말을 이었을 본인을 생각하니 얼굴이 다시 빨개지는 것 같았다. 나름 진지한 얘기였는데, 인생사를 말하고 있었는데, 부디 아무도 보지 못했길 빌며 휴지로 입을 닦았다.

젝스의 양 볼에는 웃으면 피어나는 작은 홈이 있다. 오른쪽보다는 왼쪽 볼에 더 깊은 그림자가 지곤 하는데 언제나 그랬듯 젝스는 그림자를 보이며 말했다.

"역시 대화는 참 좋은 것 같아요. 혼자였다면 생각지도 못할 방향을 보게 되니까요. 저도 자신에게 편지를 써봐야겠어요."

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나무 같아서 뿌리가 서로 엉킬수록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서로의 수액을 먹으며 새로운 양분을 만드는 거죠. 오늘 크린의 말을 통해 제 인생이 조금은 변화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느릅나무만큼이나 오래된 은행나무는 벤치를 사이에 두고 가게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느릅나무와 은행나무의 가지는 서로 엉켜 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함께 견뎌내고 있다. 오래된 느릅나무와 은행나무는 여전히 함께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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