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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5. 2024

[마지막 화] 그들의 끝, 그리고 다시 시작

[잡담술집] 33화

고풍스러운 나무 시계 시침은 VI을 가리키고 있었다. 해에게 마침내 따라 잡힌 달은 다시 술래가 되어 자신의 순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해는 달의 의지를 무시한 채 지상을 밟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벌써 해가 떴네요."

"그러게요. 날을 새본 게 얼마만인지."

지평선을 따라 쏟아지는 햇빛은 마른 나뭇가지와 바닥을 구르는 잎사귀를 노을 지게 만들었다. 검은 장작 위로 노릇하게 익어가는 고구마 같았다.

그는 가게 안까지 들어와 버린 태양의 존재를 바라보며 말했다.

"평화롭네요."

마침내 가게의 모든 바닥을 비추고 벽에 그림자마저 짧게 도망갔을 때 그는 시선을 그녀에게 옮기며 말했다.

"오늘 많은 얘기를 나눴네요. 재밌었어요."

"정말이요."


"하하하"

그녀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잔을 높이 들어 올린 젝스가 기분 좋게 휘청대고 있었다.

"젝스도 꽤나 즐거운 모양이에요."

그녀는 위스키에 젖은 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물기를 머금어 차갑게 식었던 입술은 손가락에 닿자 금세 따뜻해졌다.

"이제 마지막 한 모금이네요."

그도 자신의 잔을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그녀는 눈이 뻐근했는지 눈꺼풀을 눌렀다. 그는 하품하는 척 입을 크게 벌렸다. 사실 피곤하지도, 잠이 오지도 않았지만 왜인지 그녀에게 편안함을 주고 싶었다.

"이제 돌아가서 잠만 자면 되겠어요."

하품에 전염된 그녀는 그를 따라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내쉬었다. 눈물샘이 자극된 그녀의 눈으로 아침이슬이 맺혔다.

"네. 오랜만에 푹 잠들 것 같아요."


풍경을 스쳐 들어오는 바람에 천장전등이 흔들렸다. 주황빛을 머금었던 그녀의 잔에는 균형을 잡지 못해 생긴 노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다녀왔어요."

그들에게 사피와 이월이 다가왔다. 꽤나 멀리까지 산책 다녀온 그들은 자리를 떠난 지 1시간 만에 가게로 돌아왔다. 두툼해 보이는 연갈색 목도리도 장시간의 추위를 막을 순 없었는지 사피는 볼이 빨개진 채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이월도 볼이 달아올라 있었다. 사피와는 다른 이유로 상기된 듯했지만 그들은 모른 채 했다.

"자리에 없길래 그만 집으로 간 줄 알았는데, 산책 다녀온 거였어요?"

사피는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린은 사피의 손을 잡고 말했다.

"바람이 꽤나 불던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밤산책이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계속 걸었나 봐요. 사실 해가 뜬 지도 몰랐어요."

크린은 사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하하, 잘했어요."


이월은 들어왔던 문을 다시 바라보며 창가로 넘어온 빛을 바라보았다. 빛의 잔상이 초점에 남을 것만 같아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외의 손님은 어느샌가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듯했다.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진 가게는 창고 어딘가에 숨어 있던 개개인의 기억상자를 포개 쌓았다.

젝스는 이월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이른 아침의 공기는 새벽과 다를 바 없이 차가웠지만 달이 주지 못한 따스함이 있었다. 이월은 외투를 팔에 걸치며 웃어 보였다.

"네. 벌써 아침이네요."

젝스는 오른쪽 벽에 걸려있는 나이 든 나무 시계를 바라보았다. 초침 없는 시계는 분침을 재촉하지 않고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시간이 빨리 지나갔어요."

가게 속 데워진 공기는 사피의 체온을 올라가게 했다. 사피도 이월을 따라 외투를 벗었다.

"그만큼 이 밤이 좋았나 봐요."

사피는 연갈색 목도리를 두 번 접어 이월에게 돌려주었다. 그들은 말없이 사피와 이월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와 그녀, 사피와 이월, 젝스와 크린 그리고 태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천장의 조명을 이겨버린 자연의 빛은 그들을 잘 익은 과일처럼 물렁하게 만들었다. 스탠드가 내뿜었던 주황빛 마저 없애버린 자연의 빛은 서로 달랐던 그들의 영화를 하나로 연결했다.

젝스는 허리에 둘렀던 앞치마를 풀고 잔을 들었다.  

"마침 마지막 잔이었는데 다 같이 하고 끝낼까요?"

"좋죠, 잠시만요."

이월은 자리로 돌아가 자신의 잔을 들었다. 사피도 그녀 옆에 두었던 잔을 들었다. 그렇게 모두가 잔을 들어 올렸을 때 햇빛은 더 강한 빛을 가게로 들여보냈다. 미처 닦지 못한 책 위에 먼지도, 따뜻한 히터 공기에 몸을 맡기며 허공을 방황하던 먼지도, 누군가 움직일 때마다 폴짝 뛰어대던 바닥의 먼지도 모두 그들의 모습이 되어 저마다의 잔을 들었다.


추운 겨울, 그 끝을 알리는 2월의 끝자락은 같은 시간에서 모두 다른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은 어느 한 작은 가게에서 먼저 열린 봄을 느끼며 그들만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평일 마지막 출근을 마친 그녀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우며 중얼거렸다.

"그때는 이 코트를 어떻게 입었나 몰라."

그녀는 옷장 구석에 박혀있는 코트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코트는 그날의 시간을 기억하듯 은은한 주황빛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코트를 들고 위로 붙은 먼지를 쓸었다.

"오랜만에 나가볼까."


역시 아직은 차가운 바람에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차갑게 식은 바닥 위로 떠오른 달이 파란 조명을 내고 있었다. 크게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에 그녀는 손을 코트 주머니에 더 깊이 넣었다. 그때 작은 종이가 만져졌다. 엉성하게 접혀있는 쪽지였다.

"뭐지?"

두어 번 접혀 있는 쪽지. 그녀는 차가운 손을 입으로 불고 쪽지를 열어보았다.

"푸하하"

그녀는 그대로 어디론가로 뛰었다.


해론, 이 쪽지를 본다면 오늘 이 자리로 다시 와줄래요?
그게 언제가 됐든 저는 계속 기다리고 있을게요. 부담을 주는 건 아니에요.
단지 해론에게 공유할 저만의 멋진 장소가 있거든요.
왜 오늘 말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그야 다음에 또 해론을 보고 싶으니까요.


그녀는 뛰었다. 시린 바람을 가르며 뛰었다. 그녀를 결코 시리게 하지 못할 바람은 그저 그녀의 솜털을 간지럽힐 뿐이었다. 무척이나 상쾌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편의점이 보였다. 그때 그날처럼 가게 점원은 졸고 있었다. 넓은 창문 안으로 그가 보였다. 그때 그날처럼 그는 무릎이 늘어난 연회색 바지에 남색 플리스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때 그날처럼 젝스는 플라스틱 잔을 들어 입을 적시고 있었다. 그때 그날처럼 그녀는 검은색 코트에 길게 늘어난 갈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때 그날처럼 그녀는 가게 문을 열며 말했다.

"혼자서도 마실 수 있나요?"




[에필로그]

안녕하세요. [잡담술집] 작가 노을입니다.

저의 첫 번째 연재 작품이 끝이 났습니다.

처음엔 두렵고, 무서웠는데 벌써 연재가 완료되었다는 게 새삼 믿기지 않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7명, 모두 제 안에 존재하는 자아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주인공들을 통해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부디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바가 독자님에게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혼자서만 꿈꿔왔던 연재가 브런치를 통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참으로 감사하고 기쁩니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독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결국 글은 독자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 같습니다. 저 혼자서는 결코 완결하지 못했을 글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살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방황, 사랑의 데임, 절망과 희망을 겪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하나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흔하지만 확실한 말. 누군가의 사랑으로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우리의 삶의 목적도 결국 사랑을 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힘들겠지만, 어렵겠지만, 언제나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매일을, 매 순간을 참으로 누리시길,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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