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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28. 2024

행복이 도망치는 이유

[잡담술집] 28화

창문 밖으로 사피는 연한 갈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대화 길게 이어질 듯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렸나요?"

"아니에요. 저도 사피와 얘기하고 있었어요."

"호오-"

그녀는 땅콩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짝사랑이란 건 좋은 것 같아요. 힘들긴 하지만 삶의 원동력 되잖아요."

순간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에 그도 땅콩을 집었다.  

"사랑만큼 인생이 재밌어지는 순간도 없죠. 모든 것에 의미부여를 한다는 건 곧 모든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그는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했다. 순간 손에 묻었던 땅콩기름이 생각났다. 반들거릴 머리칼 생각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 이제 머리에서 땅콩냄새가 나겠네요."

그녀는 웃으며 그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콩왁스고 생각해봐요."


"어서 오세요."

그들의 뒤로 젝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쉴 새 없이 손님이 들어서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정말 바빠 보이네요. 젝스가 먹을 안주도 사 왔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요. 직원이라도 뽑아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가게 앞에 구인공고가 붙 있는 걸 봤어요. 혼자서는 힘들다는 걸 젝스도 알았나 봐요."

"그렇게 혼자 일하겠다고 고집 피우더니 결국 구하는군요."




젝스는 일하는 와중에도 손시계를 여러 번 쳐다보았다. 가죽의 단단함 위로 부드럽게 니스칠되어 있는 손목시계는 시침은 4를, 분침은 41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젝스의 혼잣말이 끝남과 동시에 풍경이 울렸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온 탓인지 울림의 정도가 평소보다 컸다.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보기로 한 태이라고 합니다."

당차게 들어온 태이라는 남자는 겉으론 왜소해 보였지만 숨은 근육이 많아 보이는 다부진 체형이었다. 곱실거리는 검은색 머리 아래 두껍게 접혀있는 쌍꺼풀은 왜인지 소 눈처럼 슬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무거운 멍에를 메고 굳은 흙밭을 다 갈아낼 것만 같은 열정적인 무언가가 내재되어 있었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젝스는 태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요. 지금 바빠서 그런데, 면접은 통과된 걸로 하고 바로 일할 수 있나요?"

젝스는 인사조차 급했는지 태이와 맞잡은 손을 빠르게 두어 번 흔들었다. 태이는 흐트러진 옷을 여매고 젝스처럼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오, 당황하실 줄 알았는데 고마워요."

젝스는 앞치마를 건네며 말했다.

"술 만드는 건 다음에 알려줄 테니 우선 손님들 요청사항 좀 들어줄래요? 안주는 갈색 서랍 안에 있어요."

태이의 어깨를 두드리젝스는 자리를 옮겼다. 태이는 천천히 앞치마를 두르가게 내부의 구조와 식기의 위치를 살폈다.




태이는 그들 앞으로 빈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주 좀 채워드릴까요?"

그녀는 접시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서랍을 열고 안주를 찾는 태이의 등을 바라보며 그가 작게 말했다.

"인지 일을 잘할 것 같요."

"도 딱 그렇게 생각했어요."

새로 받은 접시에는 하얀색 가루가 뿌려진 얇은 감자칩이 담겨 있었다.

"안주도 나왔으니 한 모금 마실까요?"

"좋죠."

조용히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 조용히 잠잠한 주황 전구 아래, 그들의 잔은 부드럽게 부딪혔다.


"행복하네요."

그녀는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천천히 흔들리는 머리가 가벼워 기분이 좋았다.  

"지금 이 순간이 저를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아요."

그도 그녀와 같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러게요. 행복이라는 게 별거 없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행복을 찾아 계속 쫓았을 때가 있었는데 말이에요."

"지금은 쫓지 않으시나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취기 때문인지 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네."

그는 잔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행복은 잡으려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더라고요."

위스키는 원을 그리며 얼음을 삼키려 하고 있었다.

"저는 경찰이라도 된 것처럼 행복이라는 도둑을 잡아 구속시키려 했어요. 반드시 잡아서 내 손안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언젠가 더 멀리 도망치는 행복을 보깨달았어요."

얼음을 덮친 위스키는 이내 다시 아래로 꺼졌다.  

"행복은 그저 총에 조준당하고 있 때문에 도망것뿐이었구나."


그녀는 그의 시선을 따라 잔 속의 얼음을 바라보았다.

"행복을 무작정 쫓는 게 아니라 그가 들어설 자리를 내주면 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애초에 행복은 주인의 사랑을 바랄 테니까요."

"그렇군요."

"행복은 가끔 따분하다는 이유로 곁을 떠날 때도 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무작정 믿으면 되는 것 같아요. '행복은 반드시 온다' 고요."

"행복해지려는 생각을 버려야 행복이 오는 거네요. 곁을 내주면서도 집착은 하면 안 되는 행복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심술쟁이 같아요."


그녀는 자신의 잔을 바라보았다. 얼음은 모두 녹아 위스키의 어딘가와 섞여 있었다. 무엇이 위스키고, 무엇이 얼음이었는지 이제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단지, 먹기 좋게 녹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잔 주둥이를 물었다.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입술을 차갑게 만들었다. 기분이 좋아 계속 대고 있자 마취된 것처럼 입술의 감각이 둔해졌다. 얼음을 타고 넘어온 위스키가 그의 혀를 적셨다. 평소 따한 사케를 좋아하 그차가운 술의 매력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따뜻한 술도, 미지근한 술도, 차가운 술도 모두 다른 맛의 매력을 품고 있구나, 위스키와 얼음이 어떻게 섞이든 모두 좋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인생과 행복도 어떻게 섞이든 어떤 형태를 띠단지 함께 공존하며 누리면 되는 거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잔을 내려놓고 차가운 입술을 깨물어 감각을 돌아오게 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스키를 삼키지 않은 채 입에 머금고 있는 걸 보니 미지근한 술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해론의 행복이 저에게도 방문한 기분이에요."

그녀는 위스키를 넘기고 그를 바라보았다.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에요.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건 축복이에요. 오늘 피드윌을 만나서 기뻐요."

"저도요."

그들이 아는 것은 서로의 이름뿐이었지만, 많은 것들이 연결되 있음을 느꼈다. 나이와 하는 일,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이 궁금하긴 했지만  더 연결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떠한 방해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내면과 진실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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