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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n 24. 2024

신이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여행을 보낸 이유

[잡담술집2] 24화

새벽의 하늘은 공연이 끝난 무대처럼 공기가 정체되어 있었다. 바람마저 불지 않게 된 노인의 마지막 순간을 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노인의 품과 같이 진중하고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시간에 나와있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기분이 정말 좋네요."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려 가슴을 부풀렸을 때 촉촉한 이슬이 입가에 맴돌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어둡고 흐린 앵글 속에 그들의 자막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사람 없는 길은 이런 느낌이군요. 알던 길이 마치 영화 속 세트장이 된 것 같아 신선하면서도 이질적이에요."

그녀는 그의 소매를 살짝 당기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제가 좋아하는 장소가 나와요. 호수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죠."


그녀를 따라 걸어간 길에는 우거진 나무 사이로 다양한 풀과 꽃들이 촘촘하게 피어있었다. 결코 추운 계절에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마개가 닫힌 비커 안으로 마법에 걸 신비로운 땅 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나무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워요."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더 즐거운 길이에요."


그는 그녀를 따라 다시 걸어 들어갔다. 흙으로 된 땅이 제법 단단하게 밟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뿌리가 서로 견고하게 얽혀 있는 듯했다. 파란빛의 하늘 조명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그와 그녀의 모습 비추었다. 차분한 배경 속에 생동감 있는 생명들을 보고 있자니 그는 인류가 배제된 자연의 원초적인 모습을 관람하는 것 같았다. 구름이 달을 가려 조금의 빛도 없었지만 자연은 자신의 생기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는 이슬에 젖은 나뭇잎을 만지며 말했다.

"여기는 처음 와본 것 같아요."

"모두가 공원으로 가는 큰 길만 알고 있으니까요. 저 밖에 모르는 길이에요."

그녀는 짧게 난 잔디를 손끝으로 쓸었다. 기분 좋은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이곳을 아는 사람으로 추가되었네요."

그녀의 손길에 따라 잔디에 얹은 이슬이 위로 조금씩 튀어 올랐다. 그녀는 여전히 잔디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저희만의 비밀 장소라고 해두죠."


두 걸음 앞서 가고 있던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요. 여기 큰 나무뿌리가 있거든요.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거예요."

"고마워요."

그의 손바닥으로 그녀의 작은 손톱이 느껴졌다. 간지러운 감촉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가 나무뿌리를 지나 몸을 돌렸을 때 무언가가 무릎에 닿았다.    

"여기 앉을 만한 게 있네요."

"오, 그렇네요. 저도 처음 봤어요."

그의 앞으로 앉기 좋은 나무토막 2개가 있었다. 엉덩이 라인에 맞게 파여 있는 나무의 가장자리는 시간이라는 날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듯했다. 그는 나무토막 위로 손을 얹어 흙을 털어내었다. 지름이 제법 큼지막한 걸로 보아 은행나무나 고목나무 중 하나겠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예전 같긴 하지만 먼저 이곳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나 봐요."

그녀도 그를 따라 나무토막을 쓸었다.

“그러게요.”


들은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높이 떠오른 달은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가만히 바람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얼굴 위로 든 탓인지, 입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그랬잖아요, 해론은 결국 어린아이 같은 연애를 해야겠다고요."

"그랬죠."

"는 그런 해론의 말을 듣고 나도 다시 어린아이 같은 연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해론이 말한 '어린아이 같은 연애'는 자신의 모든 사랑을 계산 없이 주는 거잖아요."


나뭇잎을 스쳤던 바람이 그의 머리칼 위로 얹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능력이에요.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 고요." 

그녀는 나무토막 의자를 만지며 나무가 자연에게 받았을 사랑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무에게 사랑받았을 자연을 생각해 보았다. 끝없는 사랑으로 이어졌을 그들의 엉킨 뿌리는 서로의 대지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크게 호흡했다. 그의 머리칼에 얹었던 바람이 그녀의 몸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숨을 내쉬 말했다.

"갑자기 드는 생각이지만, 신이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여행을 보낸 이유는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으니... 그렇다면  다양한 사랑의 형태 중 하나라도 실하게 알게 된다면 성공적인 여행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그렇네요."

그들은 다시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눈을 감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사랑, 사랑이라'

그녀는 자연 사람이 나눌 사랑의 형태를 생각하며 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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