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분 13초] 4화
[현재, 2021년]
"사인이 뭐였는데?"
녹슨은 오른손에 들려 있던 포크를 놓쳤지만 무시한 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빈 접시로 추락하던 포크는 코팅된 유리와 맞닿아 '팅'하는 소리를 냈다. 녹슨은 그를 바라봤고, 그의 눈동자는 강하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자살- 목매달아서. 그게 벌써 11년 전이야."
녹슨과 그는 작은 선술집 맨 안쪽 구석에 앉아있다. 그들 옆으로 허리춤 정도 되는 스탠드가 주황 불빛을 뿜어내 나무 테이블의 연륜을 더욱 독보이게 했다. 그들을 제외한 손님은 13명. 각자의 사연들과 공기가 떠돌고 있어 제법 시끄러웠지만 누군가 음향을 조절한 듯 서로에겐 그들의 목소만이 뚜렷하게 자리 잡았다.
"너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녹슨의 목젖이 크게 아래에서 위로 한번 움직였다.
"같은 반이었으니까, 물어보지 않아도 알려주더라."
그의 눈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녹슨은 그의 눈동자가 초점 없는 카메라 렌즈 같다고 생각했다.
"너는 괜찮아? 첫사랑이 죽었는데"
녹슨은 자신의 목소리가 무거운 공기에 압사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괜찮아. 나에게 그녀는 역겨운 기억일 뿐이야."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오른쪽 입가를 가볍게 올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숙여진 고개 넘어 그의 속눈썹이 젖어 있었지만 녹슨은 못 본 체했다.
[2015년]
"스-위-라"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5살이 되었을 때도 종종 허공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의 울림은 그저 하염없이 시린 공기에 방황하다 분해될 뿐이었으나 계속해서 그녀에게 닿지 않을 진동을 보냈다. 그는 2년제 대학교를 졸업 후 작은 회사에 취직해 방이 2개 딸린 15평 남짓 되는 연립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5년간의 대출원금과 이자를 다 지급하고 돌아온 그의 발걸음은 갓 칠해진 시멘트 바닥 위에서도 발자국이 남겨지지 않을 만큼 사뿐했다.
그는 가족이 없기에, 아니 모조리 죽어버렸기에 그의 모든 짐은 스스로 감당해 내야 했다. 성가시다고 여겼던 가족이 차라리 죽어버려 자신의 큰 가방이 솜을 담은 것처럼 가벼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발아래 웅덩이가 깊어지고 거대한 바다가 쏟아질수록 물을 머금은 솜은 그를 강하게 억눌러 몸을 진흙 속으로 가라앉게 했다. 그는 너무 힘들었다. 살아보겠다고 숨을 허덕일 때 그의 폐 속으로 들어온 것은 오직 물에 젖은 모래뿐이었다. 폐에 깊이 박힌 모래는 그의 기관지로 붉은 호흡을 내뿜게 했다.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을 온전히 흙으로 뒤덮으려 할 때 그에게 다가와 입 맞춘 이가 그녀였다. '대출을 갚을 수 있었던 것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오직 스위라 당신 덕분이었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찾아온 외로운 계절에 그의 입가에선 구름이 될 수 없는 수증기들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에 대한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했다.
"스-위-라"
그는 창문 너머 큰 고목나무 가지에 찔린 그믐달을 바라보았다. 달 아래 흩뿌려진 별들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버린 그믐달의 핏방울 같았다. 고요히 빛나는 달은 스위라를, 그녀의 신체로부터 나온 별들은 자신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스위라."
그녀가 빨아 숨 쉬는 숨 한 줌이 돌고 돌아 그에게 전달되는 것만으로도 그는 삶의 의미를 가졌다. 그렇게 그는 그녀라는 토지를 밝고 그녀라는 하늘에 몸을 맡기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스위라는 그에게 신이었다. 그녀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이가 없기에 결국 그 자체가 신이 되어버린 그녀는 그에게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가 그녀의 존재 가치를 거룩하다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그녀를 두고 몇 번의 자위행위를 시도하려던 때였다. 결국 모든 시도에서 성공하지 못한 그는 혼동을 느꼈지만, 차츰 자신이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성적인 흥분이 아닌 심적인 신앙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게일과 교제를 하고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에 크게 절망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유 없는 숭배야 말로 사랑임을 깨닫고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물론 게일을 마주하면 찢어 정죄하리라 다짐한 그였지만 이와 상관없이 그녀의 존재가 곧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끼이익-'
약간의 녹슨 소리, 그에게는 자신을 반기는 기분 좋은 소리였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공간은 저렴한 월세 탓에 질 높은 삶을 보장해주진 않았지만, 아늑한 자신만의 안식처였다. 손잡이를 돌리고 집으로 들어섰을 때 따뜻한 온기가 그의 몸 구석구석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한번 감긴 진갈색 목도리를 풀어 곳곳에 홈이 난 나이 든 나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스웨터를 벗고 하얀색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자니 세상과 단절된 것만 같은 기쁨이 느껴졌다. 자신의 모든 허물들을 벗고 신체의 껍질들이 물에 닿았을 때 알 수 없는 짜릿함에 몸을 부르르 떨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5년간의 노고가 끝나는 날이었기에 감정이 더 고조된 것이었을까. 김이 새는 따뜻한 물로 몸 곳곳에 박혀 있던 수많은 모래들을 천천히 닦아냈다. 두피로 떨어지는 물 한 방울, 겨드랑이 사이로 흘러가는 물 두 방울, 발 등을 지나는 물 세 방울이 그를 간지럽혀 미소 짓게 했다.
그는 몸을 말리고 시원한 맥주 캔을 집어 나이 든 나무 의자에 앉았다. 의자 등받이에 걸려있던 목도리는 미처 닦지 못한 그의 물기를 흡수했다. 그는 검지를 들어 맥주 캔을 땄다. 순간 방향을 잘못 튼 탓에 지문 사이로 피가 맺힐 뻔했지만 표면만 살짝 들렸을 뿐 붉은 액체가 흐르진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다리를 꼬려 비틀었던 그의 허벅지로 무리에서 버림받은 나무 가시 하나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읏"
그는 오른손에 들려 있던 맥주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 엄지와 검지로 허벅지에 박힌 나무 가시 끄트머리를 잡았다. 힘을 주어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 나무 가시는 피에 물든 채 왼쪽 허벅지의 세포들과 옹졸하게 붙어 있었다. 허벅지 안쪽 얕은 곳에서 저릿한 통증을 느낀 그는 이마와 눈썹에 주름을 잡고 좀 더 힘을 주어 단단하게 박혀 있는 나무 가시를 당겼다. 마침내 뽑힌 나무가시 위로 붉은색 핏물이 네 방울 떨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방울은 그가 앉아있던 나이 든 나무 의자 위로 떨어져 중앙부터 왼쪽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말라비틀어진 나무 의자는 마른 초원에 오아시스라도 찾은 양 결 사이사이로 귀한 양분을 흡수했다.
'삐비빅 삐비빅'
그때 좀처럼 울리지 않던 유선 전화기가 그만의 공간에서 듣기 싫은 소리로 울었다. 유광의 검은색 전화기는 위로 얹힌 회색 먼지들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여보세요?"
그는 대충 닦을 것을 찾아 허벅지에 문대며 대답했다. 그가 움켜 쥔 하얀색 수건은 붉은 피를 입안 가득 머금고 이내 토해냈다.
"나야, 게일."
허벅지에 왜 가시가 박혔나 했더니, 게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함이었나, 하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게일과 정식으로 다툰 적은 없지만 그녀와의 교제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게일을 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아니, 혹여 그를 죽일까 싶어 피했다는 표현이 더 옳겠다.
그는 게일의 목소리가 그녀로 인해 구원받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겨운 게일의 목소리는 그의 뇌 사이로 꿈틀거려 관자놀이를 아프게 했다. 심해지는 통증에 잡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던지고 왼쪽 관자놀이를 중지로 세게 눌렀다. 그가 고통에도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은 까닭은 전화 선 너머로 들려오는 게일의 목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차분했기에, 그러나 그 안에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음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응, 왜?"
그는 무거워진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계속해서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오래되고 낡은 의자는 그의 체중이 실리자 작게 삐걱 거리는 소리를 냈다.
"스위라가 죽었어."
게일의 목소리에서 차분함이 사라지고 오직 떨림만이 존재했다.
"자살이래."
그때 그의 왼쪽 허벅지에서 맺었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몸이 굳어져 들고 있던 수화기가 그의 가슴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몸은 그저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오른손이 귀 옆에 그대로 굽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심장은 한번 크게 울리더니 멎었고 이내 점차 빨라져 모든 사물들을 흔들었다. 술에 절여진 것처럼 온몸의 기능들이 비틀거렸고 알코올 없는 취기가 신체로 퍼져 모든 신경들이 흐물거렸다. 창가 넘어 보이는 구름 한 점, 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 한숨, 하얀 전등에 발각된 먼지 한 톨은 너무나도 잔인할 만큼 빠르게 그를 지나쳐 자신들의 목적지로 뛰어가고 있었다. 이불을 덮고 은둔한 망치로 강타한 것처럼 그의 신체 안으로 가슴속 깊이 거두지 못할 핏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모든 구멍에서 피가 쏟아질 듯한 공포를 절감한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어 땅을 짚었다.
"왜 나에게-. 왜 나에게-."
그는 모든 것을 다 죽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구름도, 바람도, 먼지도, 하물며 계속해서 빛나고 있을 달도, 지금 웃고 있을 사람도, 사랑을 약속하고 있을 사람도,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기도하고 있을 사람도 모조리 다 죽이고 싶었다. 예쁘게 갈린 칼날을 들고 그들 가운데 서서 행복한 인간들의 목을 모조리 찔러 죽이고 싶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 왜 너희들이 아닌 나만 이런 찢김을 당해야 하냐고 중얼대며 하얀 천장이 핏물로 더럽혀지는 상상을 했다. 당신들을 없애서라도 그녀를 살릴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생각했다.
"왜 나에게-. 왜 나에게-."
그의 눈물샘은 마침내 뜨거운 아기를 만들어 출생하고 그의 입가로 내보내 죽게 했다.
"우우우- 우우우- 우우우우-"
한참 동안 그의 어깨는 들썩였다.
그렇게 그의 신은 죽었다.
3시간이 지났다.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자세로 바닥에 누워있다. 누군가 지나갈 때 시체인 그녀와 아직 숨결이 붙어 있는 그를 발견한다면, 그녀가 아닌 그에게 먼저 다가가 몸을 돌봤으리라. 그는 허벅지 사이 흐르는 핏물 위로 몸을 맡기며 하얀색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흐르는 핏물은 곧 진득하게 굳어 그의 몸을 바닥에 들러붙게 했다.
4일이 지났다. 그는 불행하게 살았을 그녀의 일생을 상상하며 마지막까지 홀로 쓸쓸하게 죽음을 택했을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는 그녀의 두 뺨에 흘렀을 눈물을 외면한 채 살아온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옆구리를 긁어 진물 짖게 했다. 그녀를 숭배한 자신은 정녕 그녀를 위해 한 것이 없구나, 하고 그는 그렇게 4일을 더 보냈다.
그의 왼쪽 허벅지 안쪽에는 엄지손톱만 한 두터운 딱지가 자리 잡았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의 감정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무치도록 미웠다. 신이었다면 과연 자살을 택할 수 있었을까. 당신은 신이 아니었기에 천하디 천한 자살을 택했고, 이는 당신의 세상에 살 고 있던 나에게 가장 큰 배반을 준 것이다, 당신 역시 안타깝고 초라한 목숨에 불과하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너는 나에게 이러면 안 되지. 나에게 이래선 안되지. 끝까지 살았어야지. 당신은 나의 창조주이기에 영원히 살았어야지. 나의 신이, 나의 구세주가 이렇게 쉽게 가면 안 되지-."
그의 왼쪽 허벅지 안쪽에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