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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7. 2024

내 전부였던 첫사랑이 죽었다

[26분 13초] 3화

[현재, 2021년]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구부정하게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녹슨의 물음. 그는 자세를 고치고 손바닥 두 겹 정도 되는 크기의 맥주를 들었다. 약간의 살얼음 기가 있던 맥주잔은 그의 체온으로 녹고 얼기를 반복하면서 부분적으로 서리져 있었다. 녹슨은 그의 대학교 동기이다. 그들 모두 졸업했지만 동네가 가까워 퇴근시간이 겹칠 때면 종종 간판 없는 선술집에서 함께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잠시 옛날생각이 나서"

"어떤 추억이길래 그렇게 아련한 표정을 지어?"

녹슨은 맥주를 입안 가득 세 모금 크게 들이마시고 결이 거친 나무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렸다. 정도 이상으로 차가웠던 맥주가 기관지를 시리게 해 왼쪽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좋아했던 사람이 생각났어."

그는 허공에 시선을 두고 멍한 상태로 대답했다. 녹슨은 포크로 적절하게 튀겨진 감자를 찔렀다. 가늘고 길게 잘려 튀겨진 감자는 그 위로 뿌려진 소금과 합이 좋았다.   

"첫사랑 좋지. 근황은 알고 있어?"

녹슨은 호기심에 젖어 오른쪽 다리를 떨면서 손에 쥔 포크를 위아래로 까딱였다.

"죽었어."

그는 고개를 숙였고, 녹슨은 의식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모든 신체적 움직임을 멈췄다.



[2008년]


"나 스위라랑 사귄다."

2008년 9월 26일 금요일, 정확히 오전 10시 37분이었다.

"뭐?"

2008년 9월 26일 금요일, 정확히 오전 10시 38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계속 오전 10시 37분이었다. 게일의 입이 열리고 그녀와 교제한다는 더러운 말은 그의 모든 사고 회로와 시간 감각을 멈추게 했다. 그는 순간 바닥이 보이지 않는 맨홀에 걸려 하염없이 추락하는 듯한 암흑을 느꼈다. 이내 두피의 모든 모근은 그녀에게 시련이라도 당한 듯 따가운 눈물을 쏟아냈다.

"뭘 그렇게 놀라. 나 스위라랑 사귄다고"

게일은 허리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오른쪽 갈고리에 걸려있는 가방을 뒤적여 돈을 꺼내고 복도로 걸어갔다. 큰 체구 때문인지 무게가 제법 나가는 게일은 걸어 나갈 때마다 발아래로 삐걱거리는 나무 마찰음이 났다. 그는 자신의 급한 발을 감추며 자연스럽게 게일의 옆구리로 자리를 옮겼다.


"언제부터? 그런 낌새는 전혀 못 느꼈는데"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음정의 높낮이를 억지로 일정하게 맞추었다. 그러나 목젖의 떨림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한 일주일 됐나. 뭐 좋아해야 사귀냐? 우리 그것도 했어."

그는 입가로 퍼지는 핏 맛을 통해 자신이 입술을 강하게 물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너도 먹고 싶냐? 걔 진짜 맛있더라."

게일의 말은 그의 입술을 마취시켜 어떠한 단어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저 마른 입을 뻐끔거린 채 전신의 신경들이 알 수 없는 전류에 반응하는 기이한 현상을 몸소 느낄 뿐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타락한 모습. 그러니까, 그녀의 보드랍고 여린 입술과 게일이라는 더러운 인간의 입술이 닿는 상상은 그의 털을 새웠다. 흥분이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역겨웠다. 자신의 대립되는 두 가지 감정에 모순을 느끼며 위 속의 음식물 찌꺼기들이 역류하는 듯한 통증에 명치를 움켜쥐었다.


그는 멍한 눈 사이로 게일 뒤편에 있는 투명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 몸을 저 맑은 유리에 부딪혀 아래로 투신하는 것이 현재 느끼는 통증보다 덜 아프지 않을까. 아니, 깨진 유리 파편으로 게일의 경동맥을 절단한다면 그의 피가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을까.


그는 어렸다.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도,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도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게일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굳어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게일의 옆을 지나 어디론가로 달려갔다.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힌 지 15분이 지났을 때, 허파에 물이 찬 것처럼 가슴이 부풀고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틀어졌다. 그가 30분을 뛰었을 때, 장기 깊숙한 곳에서 피라도 맺힌 듯 비릿한 맛이 기도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쌉싸름한 맛을 느끼며 달리기를 멈추고 허리를 굽혀 무릎에 손을 얹었다. 금방이라도 폐가 분쇄기에 갈린 종이처럼 찢겨질 것만 같았다.

"너 여기서 뭐 하니? 로반 고등학교 학생 같은데, 지금 수업 시간 아니야?"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을 잡으며 초점 잃은 눈동자로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올려다보았다.

적당히 윤이 나는 검은색 머리, 남자치고는 하얀 피부, 빳빳하게 다려진 정장을 입은 30대 남성이었다. 이 남자는 분명 국어 선생이었다.

"아... 네, 들어갈게요."

"그래."

번듯한 남자는 그의 왼쪽 어깨를 가볍게 두 번 두들기고 학교 방향과는 다른 어딘가로 걸어갔다. 당신은 왜 이곳에 있고 지금 어디를 가는 길이냐는 의문점이 들었지만 그 따위는 그에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그는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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