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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Jul 06. 2024

그녀는 황홀했다

[26분 13초] 2화

침대 위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용의자 A.

용의자 A와의 질긴 악연은 13년 전, 18살 때로 돌아간다.



[2008년]


"오늘 학교 끝나고 뭐 해?"

2008년 9월 19일 금요일, 그녀가 게일에게 내뱉은 이백 열세 번째 말이다. 그는 그녀를 사무치도록 좋아했기에, 아니 사랑했기에 조그마한 그녀의 입가로 새어 나오는 모든 언어를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그 말이 그를 향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집으로 가지. 왜?"

게일은 꼬고 있던 다리가 저릿했는지 앉아있던 방향을 비틀며 다리를 쭉 뻗고 자신의 진갈색 머리칼을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으로 쓸었다.

"집 같이 가자고. 우리 방향 같잖아."

그녀는 게일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게일의 속눈썹은 활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뽐냈고 그 아래로 내려지는 그림자는 짙은 황록색 동공 위의 야생적인 풀을 연상시켰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풀린 그녀는 급히 게일의 손가락이 닿고 있는 연필 한 자루로 시선을 옮겼다. 투박하게 깎인 연필은 멜라니아 조각상 같았다. 그 옆에 놓인 초록색 커터 칼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흑연이 묻어 있었다.   


게일이 입을 열기까지 남은 시간은 4초, 게일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표정은 안쓰러울 정도로 초조해 보였다.

그녀의 뽀얀 피부는 새벽이슬을 머금은 가련한 들판과 같았다. 그녀의 머리칼은 들판에 흩날리는 붉은 피를 연상시켰다. 들판 한가운데 서서 입을 벌리고 있노라면 그녀의 피가 입속으로 떨어질까, 그 맛은 어떤 맛일 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머리칼을 왼쪽 어깨로 쓸어 넘기며 수분기 가득한 입술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살짝 깨물었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게일은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응, 같이 가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소녀 같은 그녀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책상에 머리를 기댔다.

'스위라'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이다. 그는 스위라의 이름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 박았다.


"야, 너 스위라 좋아해?"

3시간 전, 그가 게일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아니 그냥 가지고 놀기 딱 좋잖아.'였다.

"미쳤구나. 적당히 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말했고 이를 들은 게일은 '왜? 난 쟤가 절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 자신이 버려졌다는 그 얼굴. 재밌을 것 같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그의 분노는 얼굴에 혈액을 가둔 탓에 오른쪽 눈으로 가는 실핏줄을 터지게 했다. 그는 무언가 쥐고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게일의 식도를 타고 목청에 다다라 이내 꽂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의 손은 허공에서 방황하는 일개 파리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온전히 느끼며,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가 게일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수많은 장난감 중 하나라는 사실을 복잡한 책 더미 속에 끼워 넣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책 무더기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그녀가 농락당했기에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기에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50분 뒤 마지막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고 게일과 그녀는 집 방향이 같다는 명목 하에 함께 하교했다. 그는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만 가지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집으로 걸어갔다. 아무렇게나 방황하고 있던 산소가 그녀의 폐에 닿아 구원받고 이내 게일의 입가로 들어가 타락할 것이라 생각하니 그의 기관지가 따끔거렸다. 게일이 그녀와 수많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입김이 그녀에게 닿은 적은 단 한 번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 까, 사랑이라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아플 수 있을 까, 하고 그는 탄식했다.




그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8개월 전 집 앞 산책로였다. 입속에서도 데워지지 않을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아득한 계절이었다. 그는 밤새도록 내려졌을 눈을 보며 자신의 발목이 번갈아 사라지고 재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땅을 보며 걷다 정수리가 시려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할 때 시야 끄트머리로 하얀 눈밭 위 연갈색 어그부츠가 보였다. 그는 괜히 눈이 마주치면 어색할까 고개를 더 푹 숙이고 상대방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상대방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동선이 겹쳐 서로의 외투가 맞닿았다. 동시에 그녀의 향이 그의 코 끝을 문질렀다.


그녀의 몸에서는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포근하게 말려진 이불 냄새가 났다. 그는 그녀와 몸이 닿으면서 관성으로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 이불속에 파묻힌 석류를 발견했다. 씨도 다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탐스러워 보이는 석류가 이불속에 얌전히 있었고, 동시에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향이 그의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이불은 어느새 석류에 물든 빨간 천조각이 되어 있었다. 사람에게 날 수 있는 향이구나, 더 가까이서 맡고 싶다, 고 그는 생각을 했다.


"아, 죄송해요."

떨리는 마음을 잡고 고개를 들어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는 경악했다. 절대적인 존재를 믿게 되는 순간이었다. 신이 없다면 누가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감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황홀했다.

그녀의 눈은 황금색과 갈색사이의 어린 나무 속살과 같은 색이었으며 그 깊이는 수심을 가늠할 수 없는 동쪽의 바다 같았다. 보풀져 있는 노란색 목도리로 두 번 감긴 목선은 보일 듯 말 듯 잔잔하게 자신을 감추고는 조금씩 속살을 드러냈다. 수분기 가득한 하얀 피부를 지나 그 위에 자란 가녀린 솜털들은 어린 풀 사이로 고개를 내민 사슴의 눈망울과 같았고 가슴팍을 살짝 넘는 머리칼은 굽은 강에 흘러가는 핏물처럼 붉고 곱슬거렸다. 양 볼에는 5살 정도의 꼬마 아이가 모래사장에서 발로 한번 흙을 퍼낸 듯한 조그마한 홈이 있었다. 그 옆으로 살며시 자신의 존재를 들어내는 귓등은 추운 공기 탓인지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를 관찰하자니 그의 입가에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고작 10초 만에 그녀의 모든 것을 인지했다.

 

"하하, 괜찮아요. 저도 죄송해요."

그녀의 입김이 그에게 닿았다. 너무나도 추워 뇌가 멈춘 것이었을까. 그녀가 뿜은 따뜻한 공기는 그를 차갑게 마비시켜 신체의 모든 기능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긴 주삿바늘에 뇌 신경계를 정확히 찔린 듯 정신이 몽롱해지고 그녀 이외의 사물들은 블라인드 되었다. 이어질 대화를 생각하면서도, 손이 시려 손가락을 움찔거리면서도 시선은 계속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다치진 않으셨나요?"

그녀는 머리칼을 오른쪽 귀 뒤편으로 쓸어 넘기며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냈다. 귓불 뒤로 보기 좋은 연갈색 점이 연약하게 쓰러져 있었다. 향의 출처는 그곳이었을까. 그는 자신의 깊숙한 신체 부위에서 피어나는 욕망을 그녀의 향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네, 그럼요."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그녀가 그에게 건넨 마지막 한마디. 그렇게 그들이 나눈 유일한 대화는 끝이 났다.


그는 눈을 감고 하얀 눈밭을 계속 걸었다. 앞에 무언가 있어 넘어질까 두렵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만남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뇌 주름사이로 새기지 않으면 그녀 존재를 부정하기라도 하듯 그는 눈을 더욱 질끈 감으며 그녀의 향기를 자신에게 새겼다.

"오빠 눈감고 뭐 해? 위험해."

그의 팔을 감으며 말을 건넨 사람은 라일이었다. 라일은 그와 1년째 교제하고 있는 17살 학교 후배로, 까마귀 같이 짙은 검정 머리에 풍만한 가슴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고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라일은, 오직 아름다운 가슴으로 그를 유혹했다.


"그냥, 잠시 너를 생각하며 걷고 있었어."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순간을 방해한 라일이 얄미웠다. 고작 몇 초 만난 여자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미워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는 티를 내지 않으려 억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라일, 너무 춥게 입고 온 거 아니야?"

그는 콧등 양옆으로 나란히 상기되어 있는 라일의 피부를 가만히 쓸었다. 라일은 두툼한 손장갑을 낀 채 그의 손을 잡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긴 속눈썹 아래로 수줍어하는 라일의 눈이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오빠에게 이쁘게 보이고 싶었거든."

라일은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그에게 붙이며 말을 이었다.

"뭐, 감기 걸리면 오빠가 뺏어가던지."

그는 볼이 더욱 상기된 라일을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이 있을까, 그는 조용히 라일에게 속삭였다.

"내 사랑 라일, 언제나 너를 사랑해."

그는 그녀로 인해 잠시나마 라일을 미워한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사랑은 오직 라일 뿐이라고 되새겼다.


그러나 일주일, 보름, 한 달이 지나도 그녀에 대한 여운은 지워지지 않았다. 라일의 탐스러운 몸뚱이가 자신에게 닿았을 때도 그렇게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을 때도 그의 머릿속 온통 그녀의 연분홍색 입술과 주위를 떠돌던 연약한 먼지들로 가득했다. 라일과 신체가 닿을 때면 눈을 감고 그녀와 입 맞추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죄책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내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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