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억을 잃고 죽은 남자. 기억을 되짚어 보지만 자신이 왜 죽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그때 목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을 통해 남자는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잠깐, 그렇다면 지금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눈을 뜨기 직전 그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용의자 A와 눈이 마주친다. 13년간 이어진 용의자 A와의 질긴 악연에는 그들만이 알고 있는 살인사건이 있다.
서로를 향한 처참한 복수극과 신에게 구원받기 위한한남자의 몸부림이 시작된다.
*매주 토요일/일요일 찾아뵙겠습니다.
*22화 완결입니다.
*라이킷과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나는 죽었다. 바로 오늘 2021년 3월 17일 11시 47분에 나는 죽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순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음이 나에게 올 줄 몰랐다. 아니, 그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
죽음은 창가를 열어 둔 채 턱을 괴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늘이었다. 사뿐하게 내리는 먼지들 사이로 대부분의 가게에선 계절의 시작을 울리는 노래가 피어 나왔고 나의 옷에서도 포근함이 묻어 나오는 그런 좋은 계절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폐가 시리지 않고 오히려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을 주는 그런 좋은 날이었다. 그래도 좋은 날에 내가 죽었다. 추운 겨울, 빨리 찾아오는 암흑에 모두가 약간은 서글퍼지는, 그런 날에 죽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일까. 차디찬 바닥에 체온을 나눴을 때 꽃 한 잎 정도는 날 따뜻이 덮어주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난 나름 좋은 죽음 아니었을까.
어쨌든 내가 죽었구나. 난 이제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에게 와 준 한 잎의 꽃도 이젠 시체 위의 장식일 뿐이구나. 약간은 서글퍼진다.
내가 살아있을 때 죽음과 관련된 단서의 기억은 대부분 없다. 누군가 나에게 약을 먹이고 두 손으로 강하게 목을 졸랐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다. 다만 손의 힘은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았고 오히려 둔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난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약으로 인해 몸에 기운이 빠졌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약에 관한 기억은 없지만 지금부터 천천히 되짚어 보려 한다. 적어도 본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고 싶다.
뜨거운 눈물이 볼의 솜털을 지나 입술을 지나고 가슴팍에 떨어진다. 너무나 뜨거웠기에 눈물의 경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나의 입술은 추위에 떠는 것처럼 가엽게 흔들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딸꾹질을 하듯 강하게 변동되어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큼 악한 사람이었을까. 나에게 약을 먹이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의 목을 조를 만큼 나를 죽인 A는 그토록 내가 미웠던 것일까.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한다. 처음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꺼먼 우주 속 대기 없는 공기에 누워 혼자 덩그러니 떠돌고 있을 본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로워졌다. 그러나 기억을 되짚어 볼수록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듯 정신이 몽롱 해진다. 이윽고 내가 왜 죽임을 당한 것인지 분노가 차오르고 어이가 없어질 때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고
살아서 평범하고 소소하게 일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난 죽었다. 그 이름 모를 A 때문에 난 더 이상의 일상이 없어졌다. 아니, 그 일상을 넘어 난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하려 한다. 술을 마신 듯 정신이 희미해지고 구불구불한 뇌가 종이처럼 펴져버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분노에 차오른 감정의 마지막 단계는 체념인 것일까.
31살을 살면서 알게 된 한 가지, 사람은 이롭다는 것이다. 나는 28살이 되던 해에 과연 인간은 이로운가, 해로운가에 대한 깊은 사색에 잠겼었다. 아니, 악과 선이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모순적인 사실에 헤매었다. 각종 미디어로 전해지는 수만은 범죄들과 선행들. 범죄자들의 사연을 알고 보면 한때는 선행자였음을, 선인들의 행실을 들추어 보면 한때는 숨은 악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것에 급급해하고 있다. 과연 어떠한 사람 X를 두고 그를 이롭다, 해롭다 혹은, 선하다, 악하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나 또한 본인을 판단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낙인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저 악인을 욕하고 선인을 자랑하며 본인이 분명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자만을 증명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31살이 되던 해에 알게 된 또 다른 한 가지, 사람은 또한 이롭다는 것이다. 이로움, 경상도에서는 외로움을 이로움이라 표현한다. 난 정말 외로웠다. 죽는 날까지도 살인자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한. 아무도 구원의 손길을 주지 않은 그런 외로움의 일생이었다. 다복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지만 나름 이렇다 할 평화로운 매일을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살인을 당하는 과정 속에서 전화해 도와 달라, 살려 달라,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세상과의 결별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었을까. 결국 난 죽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아아- 정말 난 이로운 사람이었구나. 아니, 어리석었구나. 난 왜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뇌가 거머리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아- 머리가 또다시 아파오기 시작한다.
현재 내 몸이 기억하는 모든 감각들을 다시 정리해보려 한다.
시각, 눈을 감지 않아도 암흑이 덮어져 내리는 어둑함이 보인다.
청각,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마침내 어느 한 공간에 빨려 들어가 없어져 버린다.
후각, 많은 양의 음식물 찌꺼기가 부패된 물에 섞여 있는 듯한 매스꺼운 냄새가 난다.
미각, 녹은 철이 흘러내리는 듯한 피의 혼합물이 혀를 아찔하게 감돌고 있다. 동시에 침 샘 옆으로는 미묘한 석류 맛이 난다.
촉각, 통각에 가까운 가장 기억에 나는 감각이다.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울렁거리는 내장, 내 몸을 잡고 강하게 흔드는 것 같은 극심한 어지러움, 다리의 무게가 땅과 붙어버린 듯한 저릿함이 느껴진다.
기억을 더듬을수록 잊혀졌던 통증들이 다시 온몸의 신경을 타고 전해져 내려온다. 전신의 세포들이 사방으로 쪼개져 분열되고 다시 결합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세세한 통증들이 내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든다. 한시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빠져나고 싶지만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더 자세하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추측해야 한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절실하게 생각해내야 한다.
일생에 나는 비를 참 좋아했다. 하나의 물로 태어난 비가 마침내 끝없이 추락해 대지를 아른하게 적시는 그 간절함이 좋았다. 언젠가 빗방울 하나가 나에게 놀러 올 때면, 타락한 나의 내면 깊숙한 차가움을 자신으로 대우는 듯해 눈물이 아른거렸다. 내가 뭐라고, 당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에게 다가오는지. 내가 뭐라고, 당신을 죽이면서까지 나를 뜨겁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차오른다. 가지런한 속눈썹 사이로 당신과 같은 물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한다. 왜 당신은 까슬한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에게 투신해 주는 걸까. 거센 빗물들 속 자유롭게 도망가는 한 피리의 바람도 왜 나에게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일 까.
사람이 사망할 때 가장 나중에 쇠퇴하여 죽어 없어지는 것은 청각이다. 빗소리, 그 소리는 여전히 내 귓가에 맴돌았다.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의 눈물이 맺히는 소리
솨아-, 마침내 빗방울의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
분명한 빗소리였다. 처음엔 잔잔하게, 그리고 이내 거칠게 쏟아져 뿌연 안개를 일으키는 그런 빗소리였다. 역시 마지막까지 빗물은 나와 함께해 주었구나. 내 곁에 다가와 자리를 지켜주었구나. 그저 외롭게 쓰러진 줄 알았는데 나를 덮어준 이가 있었구나, 하고 조금은 살 것 같아진다. 이미 죽었는데도 살 것 같아진다. 나는 과연 따스한 날에 꽃 한 잎이 나를 덮어주길 바랐을 까, 아니면 사무치도록 쓸쓸한 날에 비 여러 잎들이 나를 적혀 주길 바랐을 까.
어라, 내가 죽었다면 지금 이러한 생각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거지? 죽은 게 아니구나. 아직 살아있구나. 갑자기 목에 조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분명 죽었다면 지금 이 아픔은 느끼지 못하겠지. 난 살아있는게 분명하다.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