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을 Jul 14. 2024

왼손에 흐르는 핏물

[26분 13초] 5화

[현재, 2021년]


"역겹다는 게 무슨 말이야?"

녹슨은 웃음과 울음이 공존하는 그의 얼굴에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물었다.

"메스껍다고. 그 여자 생각만 해도 위가 간질거려 다 토해버릴 것만 같아. 천한 인간 주제에 신인 양 더러운 가면을 쓰고 나를 농락했어. 영원히 살 것처럼 실실 웃다가 자기감정에 못 이겨 스스로 피를 본거지. 자살? 말이 좋아 고고한 죽음이지 그만큼 타락한 행위가 어딨어? '자살은 용기 있는 자의 것이다. 얼마나 힘들면 자살을 택했을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 죽을 용기는 있고 살아갈 용기는 없었던 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발버둥 치면 살아갈 수 있어."


녹슨은 그의 왼쪽 손목의 가는 줄 3가닥을 보았다. 한 줄은 아이보리색, 한 줄은 옅은 분홍색, 한 줄은 짙은 붉은색이었다. 녹슨은 그의 손목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지금은 단지 그 인간을 숭배하며 삶에 희망을 품었던 내가 불쌍할 뿐이야."

녹슨은 대답 없이 그의 좁혀진 미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껏 상기된 그의 얼굴은 그가 아직까지도 그녀에게 해방되지 못했음을 알려주었다. 녹슨은 그녀를 향한 그의 애증이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 신적인 무언가와의 애착임을 느꼈다.




시끄럽다 생각되는 두 번째 전화 벨소리가 집안의 공기를 매운 것은 그가 녹슨 과의 만남을 끊고 집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그는 아직 식지 않은 모자를 오래된 나무 의자에 던지며 우는 전화기를 쳐다보았다. 6년 전에도 느꼈던 것 같은 기분 나쁜 불안감에 그의 몸이 경직되었다. 왼발에 부딪힌 오른발은 체중의 균형을 무너뜨리게 만들었고, 그대로 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읏"

그가 낮은 신음을 낸 이유는 그의 얼굴이 바닥에 뭉개졌기 때문이 아니라 길 잃은 왼손이 오래된 나무 의자를 짚었을 때 방황하는 나무가시 한 개가 중지의 첫 번째 마디 사이로 깊숙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박힌 나무가시에서 그의 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흘렀다.


그는 늙어 제 도리도 하지 못하는 이 오래된 나무 의자를 왜 버리지 못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를 뒤로하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빨갛게 물들어져 가는 나무가시를 잡았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지만 손톱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니 쑤욱하고 빠져나왔다. 양분을 가득 먹은 나무가시는 자신의 것이었던 수액을 내뿜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누구보다 지금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말아야 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9초 후, 벨소리가 죽었을 때 그는 안도했다.

그러나 6초 후, 벨소리는 다시 태어났다.


그는 왼손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았다. 수건을 위로 덮고 문대봐도 상처는 계속되는 피의 역류를 토해낼 뿐이었다. 그때와 같은 상황, 그때와 같은 불안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저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그는 태어난 벨소리를 죽였다.  


"여보세요?"

이미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지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나야, 게일."

그의 미간은 더 이상 좁혀지지 않을 언덕을 만들었다. 방안의 미세한 먼지들은 그의 기도를 타고 들어가 폐의 수분을 모두 빨아 당겼다. 예감했던 목소리, 예감했던 사람인데 왜 속이 느글거릴까, 난 진정 그녀를 잊은 게 아니었구나, 하고 그는 탄식했다. 늙은 냄비를 긁는 듯한 쉰 기침을 한번 내뱉고 그는 물었다.

"어, 무슨 일이야?"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는 명치 아래 소장을 덮고 있는 뱃가죽을 움켜쥐었다.

"할 말이 있어. 오늘 밤 8시, 시간 괜찮아?"

"응."


그는 곧 자신이 더러운 액체를 입안 가득 뿜어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수화기가 들려있는 동안 어디서 만날지, 그리고 근황에 대해 몇 마디가 더 오가긴 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구불거리는 장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올 것 같은 토를 삼켜가며 신침을 연신 들이 켰다. 그가 약속 장소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수화기 옆으로 간신히 적어놓은 필기 덕분이었다. 동그랗게 흐려져 있는 뿌연 자국은 그의 신침인지, 눈물인지, 땀인지 구분할 순 없었다.

게일과의 짧은 통화를 마친 그는 불이 꺼진 화장실에서 변기를 잡고 몸을 들썩였다.


젖어든 옷통을 벗고 변기에 기댔다. 차가운 변기는 그의 가죽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그는 새버린 침을 그대로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고작 게일과 전화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이미 그녀는 죽어버렸는데 왜 아직도 나는 고통스러운 걸까. 그의 가슴팍에 떨어졌던 침은 허벅지로, 그리고 바닥으로 진득하게 내려앉았다.


그녀가 자살한 지 11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지 6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다. 신에게 버림받아 아프긴 했지만, 아니 애초에 신이 없었다는 충격에 괴로워 하긴 했지만 벌써 6년이나 지났다. 그런데 왜 아직도 그녀와 관련된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다시 아파지는 걸까.

"난 결국 그녀의 소유인 것인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게일과 만나기 전까지 멀끔한 옷을 입는 것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변기에 체중을 기대 조금의 쉼을 얻는 것뿐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